창작 편집
2025년 12월 31일 11시 45분, 밤은 아직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고, 도심은 숨을 고른 채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그 한가운데,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선 초고층 타워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검은 밤을 배경으로,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몸체는, 차갑고 단단한 침묵을 유지한다.
벌써 강기슭의 앞쪽은 사람들의 장벽으로 다가갈 수 없을 정도다. 우리는 최전방은 이미 포기했다. 그들과 살짝 떨어져서, 초고층 타워를 관조한다. 스마트폰 시계가 59로 바뀐다. ‘2026’이라는 숫자가 초고층 타워의 벽을 타고 위아래로 흐른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숨을 죽이며,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십, 구, 팔, 칠, 육, 오, 사, 삼, 이, 일!
타워의 꼭대기에서, 불꽃이 터진다. 단순한 불꽃놀이가 아니다. 왕관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빛의 폭발이다. 도시는 정지해 있고, 하늘은 터지고 있다. 시간은 두 겹으로 흐른다. 하나는 불꽃처럼 찰나에 사라지고, 다른 하나는 이 타워처럼 묵묵히 쌓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라질 빛을 붙잡기 위해 열심히 팔을 들어 올린다.
우리는 언제부터 초 단위까지 카운트하게 됐을까? 아마도 처음에는 초를 몰랐을 것이다. 시간은 해의 그림자로 왔고, 아침과 저녁 사이의 숨결로 흘렀다, 초라는 개념은 자연이 아니라, 기계가 낳은 시간이다. 중세 시대에는 광장에 괘종 소리로 시간을 알리는 클럭이 설치됐다. 하지만 그때도 시와 분은 있었지만, 초는 아직 과했다.
기차가 생기자, 도시는 서로의 시간을 맞춰야 했다. 이제는 소리가 아니라, 시각적으로 시간을 알리는 워치가 등장했다. 이 워치는 공장이 생기자, 사람의 몸을 분 단위가 아니라, 초 단위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초는 인간을 위한 단위가 아니라, 시스템을 위한 단위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해가 바뀔 때마다 초 단위로 카운트할까? 해가 바뀌는 순간은, 사실 자연에는 초가 없다. 지구는 늘 같은 속도로 돌고, 태양은 아무 의식 없이 떠오르며, 새해라는 경계는 하늘 어디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해의 마지막 밤이 되면,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우리가 해가 바뀔 때, 초 단위로 카운트하는 이유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다. 1월 1일 0시는 자연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합의한 문턱이다. 보이지 않는 경계이기에, 우리는 손으로 더듬듯 숫자를 붙인다. 초는 그 문턱에 놓인 발판 같은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함께 있기 위해서다. 우리 각자의 삶은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지만, 카운트다운을 하는 그 몇 초 동안만은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리듬으로 호흡한다. 도시, 나라, 대륙을 건너, ‘지금’이라는 점에 우리는 잠시 겹쳐 선다. 초는 그때 고립된 개인을 묶는 가느다란 실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초를 세면서,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얻는다. 시간은 거대한 강이지만, 우리는 그 강에 작은 난간 하나를 세운다. “여기까지가 작년이고, 여기부터는 새해다.” 카운트다운은 시간을 바꾸는 의식이 아니라, 나를 설득하는 의식이다. 이제는 정말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도 된다고.
불꽃이 터지는 바로 그 순간, 사람들은 환호한다. 왜냐하면 그 빛은 초가 끝났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숫자는 사라지고 나면, 같은 리듬으로 호흡했던 사람들의 연대는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진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르던 소년들처럼, 피리 소리가 사라지면, 그들도 홀연히 흩어진다.
한편, 초 단위로 쪼갠 끝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시간의 연속성을 잊고, ‘리셋’이라는 환상을 잠시 믿는다. 그래서 해가 바뀔 때의 카운트는 효율의 언어가 아니라, 의례의 언어다. 카운트다운의 마지막 몇 초는 지난 나와 오지 않은 나가 겹쳐 서는 시간이다.
떠나는 내가 한 발짝 물러서며 자리를 비우고, 오지 않은 내가 아직은 들어오지 않은 채 숨을 고르는 틈. 그래서 그 순간은 기쁘기보다 묘하게 엄숙하다. 이 둘의 이임식에는 연설도 없고 악수도 없지만, 마음속에는 짧은 인사가 오간다. 지난 나와 오지 않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니다. 같은 몸, 같은 기억, 같은 결핍 위에 시간만 한 겹 바뀐 연속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