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휘발되고 비탄만 남은 장릉

창작 편집

3시 반에 눈을 뜬다. 2월 첫 번째 토요일 새벽이다. 오늘의 답사지는 영월이다. 나에게 영월은 비운의 군주 단종의 고장이다.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살짝 설렌다. 집을 나서려면 2시간 남짓 남았다. 짐을 챙기며 일기를 적는다. 계속 시간을 확인하다가, 6시에 출발한다. 일단 접선 장소인 덕평 휴게소로 향한다.

어둠이 짙게 깔린 올림픽대로를 달린다. 이른 시간에도 제법 차가 많다. 곧 중부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스마트폰에서 감미로운 스트리밍 음원이 흘러나온다. "고향의 향기 들으며" 약속 시간은 7시 반이지만, 나는 6:40에 도착한다. 강릉 방향 휴게소로 건너간다.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았지만, 카페에는 불이 켜져 있다. 빵과 커피를 주문해 놓고, 친구들에게 도착 문자를 날린다. 과연 기획자 친구는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내 주문 번호가 울린다. 이몽룡이 거지꼴로 월매 앞에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듯, 나도 빵과 커피를 식도로 쑤셔 넣는다. 순식간에 빵이 삭제된다. 홀로 쓴 커피를 들이켜니, 16세에 혈혈단신 머나먼 영월로 유배된 단종의 외로움을 공감하게 된다.

카페를 들르는 손님들은 대부분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하고 있다. 너른 카페 공간에는 나만이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신다. 계속해서 주문 번호가 울리며, 손님들이 교체되고 있다. 이런 게 '군중 속의 고독'일까? 이제는 졸리기 시작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운전을 하지 않고, 기획자 친구 차에 동승하는 것이다.

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를 읽는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지금과 같은 여명도 반복되지 않겠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쉼브로스카는 세상을 통달한 신선 같다.

우리는 먼저 동강 물줄기로 자신의 몸에 생채기를 내버린 돌개 바위를 답사한다. 이제까지 까맣게 알지 못했던, 화석 덩어리 스트로마톨라이트를 관조하며, 감탄한다. 그리고 영화 '쇼생크 탈출'의 듀프레인이 락 해머로 20여 년간 탈출 동굴을 팠듯이, 오랜 세월 동안 지하수는 영월의 산자락을 녹여내며 뚫어버린 고씨 동굴을 걷는다.

드뎌, 산 어깨의 완만한 경사에 몸을 기대듯 자리 잡은 장릉에 오른다. 영월 장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구릉 자락에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이 너른 장풍득수 명당자리에 좌우 대칭을 갖추고 권력의 코드를 들려줄 때, 이곳은 조용히,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고, 아래를 굽어보지도 않으며, 그저 산과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장릉은 단종의 무덤이다. 장릉은 왕릉이되, 왕릉답지 않게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능이 아니라, 이름조차 격하된 묘였다. 그나마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원되며, 슬픔은 휘발되고, 비탄만 남아 있다. 복위는 명예를 돌려주었지만, 단종이라는 이름 아래에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었던 소년 왕의 생애가 여기에 말없이 저장되어 있다.

나는 오늘 처음 바라보는 장릉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겹친다. 마리아는 이미 아들의 희생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로 그저 예수를 받치고 있다. 이곳 장릉도 고개를 들지 않고, 능선 자락에서 단종의 비극을 말없이 떠안고 있다.

‘피에타’에서 마리아의 슬픔은 외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저 그녀의 품 안에서 응축되어 있을 뿐이다. 장릉에서도 슬픔은 확산되지 않는다. 찾는 이들은 단종의 힘들었을 생애를 이야기하며, 그저 비탄을 느낄 뿐이다. 피에타는 울음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깊은 애도를 보여주고, 장릉은 권력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난 자리에서, 더 오래 비탄을 남긴다.

장릉은 높지 않은 구릉 자락에, 전혀 대칭적인 질서와는 관계없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이 위치는 방문객들의 마음에 억울함을 외치는 대신에 비탄만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단종에게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를 들려주고 싶다.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당신은 16년 만에 너무도 홀연히 사라졌지만, 우리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아름다운 존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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