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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으로부터의 탈출

가면

2024년 12월 폭동이 일으킨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가 우리 사회를 덮치며, 극도의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다. 2025년 1월이 시작되면 혼돈이 진정될 거라 기대했지만, 2025년 2월 현재 질풍노도가 만들어낸 해무는 점점 더 우리 사회를 미궁으로 밀어 넣는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유튜브를 보다가 지금의 혼돈을 살짝 이해할 수 있는 진단 책을 발견하고, 바로 읽기 시작한다.

그것은 1941년에 출간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이다. 물론 원서를 읽지는 못하고 임채광 교수의 해설서를 읽는다. 이 책은 157페이지 분량이지만, 임채광 교수가 엄근진의 목소리 톤으로 세 시간 내내 한 번도 쉬지 않고 풀로 강의하는 느낌이다.


현대의 개인은 새로운 형태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개인의 자유를 부담으로 느껴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 한다고 프롬은 진단한다. 알리의 노래 ‘365일’ 가사 “드라마 영화 속에 나오는 삼류 사랑 얘기가 모두 다 내 얘기만 같아”처럼,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우리 사회의 얘기 같아 프롬에 빠져든다.

나는 대학 시절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강의실에서 도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강의실의 뒷 출입문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고, 강의가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제일 먼저 나갔다. 처음에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들으면, 그냥 무언가로부터 도피하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지만, 도피는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행위인데, 왜 자유를 얻고서 다시 자유로부터 탈출하려는지 의문이 든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다 읽고 나서, 나는 과연 부담감에 도망친 적이 없는지 회고한다. 나는 4번 정도 크게 사고 치고 도피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다가 토낀 것이다. 나는 아내를 대학교 3학년 4월 초에 만났다. 그때 아내는 신입생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아내와 열심히 밀당을 했다. 그러다가 겨울 즈음에 돈독한 관계로 발전했다. 나는 덜컥 겁이 나서, 잠수를 탔다.

10일 후에 아내가 꼭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다시 만났다. 아내는 펑펑 울었고, 나는 아내를 외면하지 못하고 다시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8년 뒤에 결혼했다. 그 후에 갑자기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오빠, 근데 나 다 꼬셔놓고 왜 도망갔어?”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부지불식간에 답한다. “솔직히 쪼금 부담됐어.” 아내는 주저하지 않고, “이런 나쁜 새끼!”라고 말하며, 나를 째려본다. 이 첫 번째 도피 사건은, 아내가 수세에 몰리면 내가 사고 친 목록 1번 레퍼토리로, 들이미는 전가의 보도다.


사고 목록 1번 레퍼토리를 변명할 만한 문구를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눈이 빠져라 찾는다. “개인은 혼자가 되었다. 이젠 모든 것을 각자의 수고를 통해 해결해야 했으며, 전통적인 지위의 안정성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나도 22살의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나 혼자만의 수고를 통해서 해결해야만 해서 연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에 쪼금 부담감을 느꼈다. 그래서 토끼고 싶었다. 지금 이렇게 변명하면, 아내는 어떻게 반응할지 사뭇 궁금하다.


두 번째 도피 사건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S 전자에 입사했다가 6 개월 만에 특별한 이유 없이 그만둔 것이다. 나는 대학 학과를 선택할 때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좋게 보아주는 것을 선택했다. 이러한 선택의 폐해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학년 중간고사를 보고 나서 꽝을 뽑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대학 시절을 그냥 시간 때우기로 보내다가, 아내를 만나고 나서 무언가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그렇다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냥 4학년이 됐고,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석사 과정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얼떨결에 같이 준비했다. 나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래서 그냥 S 전자에 입사했다.


지금은 S 전자가 입사하기 어려운 회사이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대한민국이 최고의 호황기여서 공대 학과 사무실에는 S 전자, L 전자, H 전자, D 전자 등의 입사 원서가 쌓여있었다. 나는 백화점에서 쇼핑하듯, S 전자를 선택했다.

S 전자의 그룹 연수는 나의 군대 시절보다 더 빡셌다. 겨우겨우 그룹 연수를 무사히 마치니, 이번에는 계열 연수가 버티고 있었다. 속으로 투덜대며, 계열 연수도 사고 치지 않고 통과했다. 이번에는 보직 경쟁이 시작됐다. 좋은 보직은 석사나 박사들을 먼저 배정했다. 나는 원하는 보직에 가지 못했다. 근데 지금 회상해 보니, 그 보직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 보직마저도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고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였던 것이었다.


나는 갤러리가 골프 경기를 구경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연구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회사를 다녔다. 어느새 가을 학기 석사 과정 시험이 다가왔다. 그것도 응시했다. 이번에도 또 떨어졌다. 너무 창피했다. 그냥 회사가 다니기 싫어졌다. 바로 회사에서 토꼈다. 그러고 나서 아내에게 회사를 그만둔 것을 말했다. 아내는 나에게 물었다. “왜 그만뒀어?”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다 계획이 있어.”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최우식에게 놀라서 말했던 것처럼, 아내도 이야기했다. “아 오빠는 다 계획이 있구나.”

나는 움찔했다. 개뿔 계획은, 그냥 군대 같은 회사가 싫어서 그만둔 건데! 그 뒤로도 나는 20개월 내외로 회사를 다니다가 미련 없이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아내는 내가 반복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관찰하고 나서, 어느 날 나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오빠, 그렇게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 나에게는 싫증 내지 않아 줘서 고마워!” 나는 진짜로 고마워하는 것인지 비꼬는 것인지 파악할 수 없어서 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두 번째 도피 사건의 핑곗거리를 꼼꼼히 찾는다. “중세 시대에는 구성원들 사이에 경쟁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은 각기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전통적으로 정해진 생활은 보장되어 있었다.” 나는 회사 동료들과 경쟁하고 싶지 않아서, S 전자를 그만둔 것이라고 핑계를 댄다면,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줄까?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겠지.


세 번째 도피 사건은 두 번째 도피 사건이 터지고 10여 년이 흐른 후에 발생했다. 나는 IMF 사태 때,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 쪽팔린 마음에,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엔지니어를 하지 않겠다고. 그러다가 4년 4개월 동안 수험생으로 지내며 우여곡절 끝에 변리사가 됐다.

처음에는 특허 사무소의 구성원 변리사로서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19개월이 지나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만난 동기가 나에게, “너는 팀장 변리사로 일할 수 있는데, 왜 구성원으로 있냐?”라고 말하며, 나를 잔뜩 띄웠다. 나는 배우가 감독의 ‘레디’ 콜을 기다리듯, 이미 유혹에 넘어갈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아마도 내 옆을 지나가는 누군가가 나에게 “토끼”라고만 외쳤어도, 나는 ‘도끼’로 알아듣고 바로 찍혀 넘어갔을 것이다.


동기의 멘트는 토끼고 싶은 내 욕망에 기름을 부었다. 그날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빨리 동기의 사무실로 이직했다. 일단 나는 내 팀을 구성하고 싶었다. 난생처음으로 면접을 통해서 직원을 뽑았고,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원에게 엄청난 비전을 제시하며 스카우트하기도 했고, 옆 팀의 직원도 꼬셔서, 4명의 팀을 꾸렸다.

나는 의욕은 넘쳤지만, 초보 팀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담당한 클라이언트는 대기업이었고, 나를 관리하는 클라이언트 직원은 엄청난 베테랑이었다. 그 직원은 철저하게 통제했다. 예전에는 내 업무만 완수하면 쉴 틈이 있었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는 내 업무의 템포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 이직한 사무실에서는 내 업무만으로도 버거웠다. 매일 팀원의 전체 실적을 보고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지옥이었다. 새 클라이언트는 업무 종료 마지노선을 12월 30일로 정했다. 나는 12월 24일에도 거의 11시 30분까지 일을 했다. 아내는 나와 팀원을 위해서 간식거리를 챙겨 왔다. 나는 아내를 보자마자 차를 타고 어디론가 훌쩍 토끼 자고 말할 뻔했다.

어느덧 12월 28일이 다가왔고, 클라이언트는 이제는 하루에 세 번씩 팀 실적을 보고하도록 했다. 미칠 것 같았다. 그날 저녁에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건에 대해서 완료 시점을 물었다. 일단 팀원들을 다독이며, 12월 30일이 데드라인임을 주지 시켰다.


그러다가 12월 29일이 되니, 클라이언트의 질문은 집요해졌다. “내일까지 완료할 수 없으면, 오전 중에 말씀하세요!” 나는 단호하게 즉답했다. “우리 팀은 내일까지 마칠 수 있습니다.” 오후 3시 즈음에 팀 실적을 문의하는 메일이 왔다. 나는 팀 실적을 정리해서 답신 메일을 보냈다. 30분 후에 내 핸드폰 벨이 울렸다. 그 직원은 나에게 남아 있는 모든 건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바로 상사에게 지금 상황을 보고했다. 상사는 나를 질책하는 대신에 나에게 수고했다는 위안을 던지고, 남아 있는 건을 모두 반납하라고 했다.


나는 클라이언트 직원에게 반납하는 건의 목록을 보고했다. 그리고 팀원들을 데리고 술집으로 갔다. 그날은 펑펑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 정호승 시인의 시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가 그날의 내 심정을 절절히 노래하고 있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서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하여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다음날 출근해서 상사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상사는 당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사표를 극구 만류했다. 나는 또 토끼고 싶어졌다. 갑자기 상사는 나에게 해외 팀으로 보직을 바꿀 것을 제안했다. 나는 그 제안에 솔깃해져서, 침울한 기분이 살짝 풀렸다.

나는 평소 해외 관련 업무를 해보고 싶었지만, 외국어 실력이 일천하여 기회를 잡지 못했다. 나는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고 그 제안을 넙죽 받았다. 하지만, 내 팀원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될지 걱정이 앞섰다. 상사는 당신이 먼저 살아야지 지금 남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일단 나는 뭉갰다. 그리고 얇실하게 자리만 살짝 옮겼다. 팀원들은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런 눈빛을 외면했다. 새로 옮긴 팀에서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심지어는 이 주일만에 일본 출장을 보내주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떠났다. 오사카 사무실에서 미팅을 진행하고 노조미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이동했다. 2박 3일의 출장은 너무 신났고, 나는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회사에 출근했다.

나를 제외한 팀원들은 고아처럼 풀 죽어 있었다. 한 직원이 나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고 말했고, 바로 그날 넷이 술을 마셨다. 두 직원이 나에게 서운함을 쏟아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나는 너무 미안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오히려 그들도 당황해서 멈칫했다. 그 이후에는 머릿속이 텅 비어 있다. 결국 나는 사무실을 그만두었다.


세 번째 도피 사건을 변명할 건더기를 찾기 위해서, 자유로부터 도피를 막고 품지만, 좀처럼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에는 다른 역작 ‘소유냐 존재’를 뒤진다. 포도시 한 구절을 찾아내 안심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실패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출발을 내딛는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팀원들의 서운함을 표출하는 것도 견디지 못했다. 나는 부담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또 토꼈지만, 그 이후에도 가끔씩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잘 지내고 있다. 세 번째는 잘 토낀 건가?


네 번째 도피 사건은 아들이 5살 때 벌어졌다. 당시, 외아들인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고, 어머니는 광주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가급적 자주 보고 싶어 하셨고,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에 내려가는 정도였다. 그래서 5월 즈음에 서울 우리 집을 방문했다. 지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중에 핸드폰이 계속해서 울렸다. 휴대폰 너머로 아버지가 화를 내셨다. “다시는 너희 집에 안 오마!” 이 말만 하시고, 확 전화를 끊으셨다.

나는 너무 불안했다. 무언가 엄청난 사달이 났구나 짐작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갔더니, 아들과 아내는 울고 있었다. 아내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일단 누나 집에 머물고 있는 어머니에게 찾아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역정을 냈다. “내가 너를 잘못 키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냥 내 방에서 잤다.


다음날 회사에 일찍 출근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처형댁으로 가버렸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이 다투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답변은 중구난방이었다. 일주일 후에 어머니랑 아버지는 광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내를 달래서 집으로 데려왔다.

3년이 흐른 뒤에 아내가 술자리에서 내게 물었다. “오빠 그때 왜 바로 안 데리러 왔어?” 나는 머뭇머뭇하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나는 너무 두려워서 산으로 도망가고 싶었어.” 그러자 다시 물었다. “그럼, 아들과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다시 답했다. “나는 네가 다 해결하고, ‘오빠 다 해결 됐으니 집으로 돌아오세요’라고 신문에 광고해 주기를 바랐지.” 그러자 아내는 틈도 주지 않고, “이런 비겁한 새끼”라고 화를 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엄청나게 찌질하고 비겁했네! 그렇지만, 네 번째 도피 사건의 변명거리도 훑는다. “루터가 교회로부터 권위를 빼앗가 이를 개인에게 부여했으며, 그의 신앙과 구원관은 주관적 및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고 본다.”

나도 네 번째 사건의 해결책을 내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했고, 그 당시 나는 이 사건과 유사한 경험을 겪어 본 적이 전혀 없어서, 부담감이 내 능력을 넘어섰기 때문에, 나는 탈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변명을 들으면, 대한민국의 여성들은 아내처럼, “이런 비겁한 새끼”라고 외칠 것이다.


이제는 프롬의 진단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사회의 혼돈을 이야기한다. 그의 진단 중에서 이 대목에 눈길이 끌린다.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갈 때 누릴 수 있었던 권한들을 포기하고 권위주의적 독재자에 복종함으로써 안락과 풍요함의 도피처를 취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권위주의적 독재자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추종자들을 기반으로 폭력과 부조리함을 제공하고 있다.


고딩 역사 시간에 독일은 1868년 오페르트가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는 사건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후에는 1963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우리 정부가 독일에 광부들을 파견하며, 10,000km 떨어진 독일은 우리에게 왠지 모르게 친근한 이웃처럼 느꼈지만, 실질적인 관계는 데면데면했다. 그래서 그런지 프롬이 1941년 나치 사회를 진단한 것이 80여 년 후인 지금 우리 사회에 딱 들어맞는 게 신기하기까지 하다.

일단 독일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독일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는 ‘제3제국’이다. 제1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이고, 제2제국은 독일제국이며, 제3제국은 나치독일이다.


신성로마제국은 영어로 ‘Holy Roman Empire’라고 불린다. 이에 대해서 프랑스의 엄친아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라고 평했다. 신성하지도 로마도 제국도 아닌 신성로마제국은 800년부터 1806년까지 중앙유럽에 존재했던 국가였다.

다음으로 독일제국은 프로이센을 기반으로 성립되었다. 이러한 프로이센은 영국에 비해서 산업혁명이 늦었지만, 물리와 화학 분야에서 1850년 이후로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산업, 기술, 과학 강국이 되고, 이를 기반으로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했다.


이후 독일제국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되었던 1870년 보불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독일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정치인은 철의 제상 ‘비스마르크’이다. 그는 독일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으며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독일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주도적으로 일으켰으며, 사고 친 대가로 제정이 붕괴되었다.


한편, 나치독일은 1933년 히틀러가 건설한 국가다. 히틀러는 신성로마제국과 독일제국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며, 자신의 국가를 제3 제국이라고 지칭했지만,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 패망하면서 해체되었다.

우리 사회는 조국이라는 아버지가 다른 나라에 의해서 살해되고, 후손만 덩그러니 남았다가, 용감한 큰 형님들이 일본과 열심히 싸웠지만, 미국 덕분에 독립하고, 미국의 영향에 살아남았던 다른 형님들이 세운 나라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두 번의 아픔이 사회 곳곳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우리 선배들은 오로지 잘살아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들을 엄청나게 희생하면서 짧은 시간에 고도의 산업화를 이룩했다. 우리는 1962년 수립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필두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을 육성했고, 이후 1970년대 중화학 공업 분야의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1990년대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 등의 전자 정보 통신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 선배들은 1970년대 본격적인 산업화 시기에 각자에게 주어진 냉혹한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사회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각자의 수고를 통해서 해결했다. 특히, 부나 권력이 없는 민중들은 전통 사회에 존재했던 사회적 안전판이 완전히 상실되어, 사회에 덩그러니 던져진 ‘홀로 된 군중’으로 전락했다.


우리 선배들은 오로지 잘살아보겠다는 일념만으로 자신을 무장시키고 앞만을 바라보며 돌진하는 돌격대처럼 살았다. 이분들의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주동자들은 노동자들을 자신의 독립성과 자율성 지위를 독재자 대상, 달리 말해 신으로 포장된 권력자나 자본가에게 양도함으로써 권력에 굴종하도록 한다.”

우리 선배들은 ‘신으로 포장된 권력자나 자본가’가 만든 터널에 갇혀 오로지 출입구를 통해서 보이는 빛 한 줄기만을 향해서 나아갔던 것이다. 우리 선배들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통해서 익힐 수 있는 근대성을 훈련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전근대적 사고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초딩을 다닐 때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라고 시작하는 국민 교육 헌장이 각 교실에 크게 걸려 있었다. 심지어는 그것을 암기하게 했다. 나는 그 내용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그냥 외웠다.

그 당시에 ‘민주주의’는 마냥 좋은 것이지만,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가르치지 않았다. 나도 민주주의는 서양의 엄청난 마법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민주주의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던 계기는 1987년 610 항쟁이었고, 우리 사회도 이 항쟁을 계기로 근대성이 한층 성숙되었다.


근대성에 익숙한 세대와 전근대성에 익숙한 세대 사이의 갭은 생각보다 크다. 내가 고딩 시절에는 자신의 호불호를 표현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교육받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우리 사회는 타인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의 언어 습관 중에서 부정 의문문에 대한 답변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보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누군가 나에게 “밥 안 먹었니?”라고 묻는다. 내가 밥을 먹었으면, 나는 “아니요, 밥 먹었어.”라고 답하고, 내가 밥을 먹지 않았으면, “예, 밥 안 먹었어.”라고 답한다.


그런데 영어로 나에게 “Didn’t you eat lunch?” 또는 “Did you eat lunch?”라고 묻는다. 내가 밥을 먹었으면, 긍정으로 물어보건, 부정으로 물어보건, 동일하게, ”“Yes, I did.”라고 답하고, 내가 밥을 안 먹었으면, 긍정으로 물어보건, 부정으로 물어보건, 동일하게, “No, I didn’t.”라고 답한다.

이런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도는 근대성에 익숙한 세대보다는 전근대성에 익숙한 세대가 훨씬 더 강렬하다. 전근대성에 익숙한 세대들은 주변 동료 결혼식에 열심히 참여했고, 가능한 축의금을 많이 주려고 했다. 근대성에 익숙한 세대들은 결혼식 관례를 익힐 기회가 많지 않아서, SNS에 결혼식 참여 범위나 축의금 규모를 물어보는 경우가 많고,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결혼식 참여 범위나 축의금 규모에 대한 국룰이 규정되고 있다.


전근대성과 근대성이 혼재되어 있던 우리 사회를 탈근대로 빠뜨린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코로나 사태다. 2020년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언택트 사회를 맞이했다. 생존이 가장 최우선이었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언택트는 우리 사회에서 용인되던 다양한 관례를 무너뜨렸다. 또한 직접 접촉을 엄청난 속도로 줄여나갔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많은 가게에서 키오스크를 상대해야만 한다.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경계로 1987년이 제시됐고,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경계로 2020년이 제시됐다. 과연 우리들도 1987년 이후에는 근대적으로 살아가고, 2020년 이후에는 탈근대적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가 무지개를 그릴 때는 빨, 주, 노, 초, 파, 남, 보 7가지 색깔을 명확한 반원의 띠로 구분할 수 있지만, 실재의 무지개를 보면 각 색깔의 경계가 흐릿하다. 우리에게 스며들어 있는 전근대성, 근대성 또는 탈근대성도 무지개의 경계와 유사하지 않을까?


우리 선배들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 없으며, 스스로 자유로움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자유로움을 허락할 수 없다. 우리보다 먼저 이러한 현상을 경험한 서구 사회에서는 전근대성에서 근대성으로 또는 근대성에서 탈근대성으로 옮아가는 때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사회적 진통이 크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는 70여 년 동안 전근대기, 근대기 및 탈근대 기를 경험하고 있다.

프롬이 나치 사회에 대해서 지적한 사항 중에서 우리 사회에 직접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평범한 개인은 무력한 존재에 불과하기에 사회적 주제가 내 앞에 떨어진다 하여도 누군가 전문가의 진단과 비방이 나올 때까지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지닌 권위에 너무 쉽게 휘둘린다.


전문가는 일종의 대리인이다. 대리인은 클라이언트에 비해서 관련 정보를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클라이언트와 대리인 자신의 이익이 상충되는 경우에 클라이언트의 이익보다는 대리인 자신의 이익이 많아지는 쪽을 선택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것이 대리인의 딜레마다.

우리가 전문가라는 타이틀에 휘둘려 맥 놓고 모든 것을 전문가에게 맡긴다면, 전문가는 공동체의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기보다는 전문가 자신의 이익이 커지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직접적으로 전문가 개인의 이익을 선택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전문가가 속한 직역의 영향력이 커지는 쪽의 선택을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대리인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이 전문가들이 진단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의 진위를 공개적으로 따져 물어야 하며, 전문가들이 진단하거나 비방하는 방법을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요구해야만 한다. 이러한 요구는 첨단 과학 기술 분야에는 특히나 더 필요하다.


두 번째는 중산층에 대한 모순점 지적이다. “강자에 대한 사랑, 약자를 증오하는 비열함, 적개심, 돈에 있어서나 공감의 감정에 있어서 인색한 이들은 금욕주의자를 자처한다.” 우리 사회에서 그들은 중도주의자 인체 하다가 자신들의 이익이 되는 쪽을 주저하지 않고 선택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다 읽으면, 더 답답해진다. 프롬은 자신의 역작에서 구체적인 솔루션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프롬은 백면서생의 연구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나치 독일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긴, 어느 집에 불이 났으면, 불이 났다는 것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 불을 꺼야 하는 것은 집주인의 미션일 것이다.


솔직히 나에게도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지를 제시할 혜안은 없다. 다만, 프롬이 이야기한 한 줄기의 희망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가 자신의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우리 각자에게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나도 나만의 것을 느끼고 이야기할 때가 제일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읽기:임채광 지음/세창미디어/2024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박찬국 지음/세창미디어/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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