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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로 결혼하면

가면

우리가 평범한 삶을 꿈꾼다면, 가장 중요한 선택은 결혼과 직업일 것이다. 우리는 일생의 절반을 가정에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직장에서 보낸다. 가정은 쉼과 회복의 장소이자, 사랑과 갈등이 동시에 빚어지는 무대이고, 직장은 단순한 생계의 수단을 넘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증명하는 무대이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에서 스토너의 인생이 힘들어진 데는 아내 이디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이디스는 사랑이 아니라 도피로 결혼을 선택했다. 그 출발부터 이미 균열이 있었다. 스토너가 기대했던 따뜻한 동반자 관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그의 결혼 생활은 고립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디스는 스토너에게 무례한 태도를 여러 번 보인다. 스토너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피아노를 치고는 형편없는 연주 끝에 몸이 좋지 않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겉으로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삶과 결혼,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불만이 무례함으로 표출된 것이다.

스토너는 이런 이디스를 바라보며,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갑작스러운 불안감과 회의를 느끼는 것은 모든 남자들이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라고 회고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주로 여성들이 겪는 불안과 회의를 스토너가 토로하는 장면은 생경하기만 하다.

이디스는 결혼 후에, 집에서 피로연을 준비한다. 갑자기 피로연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소연한다. “이젠 결코 유럽에 갈 수 없겠죠. 에마 이모는 곧 돌아가실 거고, 나한테는 그런 기회가” 그녀는 돌연 불행을 과장된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슬픔의 표현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자기 연출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닫혀버렸다는 비극을 내세워, 손님들 앞에서 동정과 주목을 얻으려 한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줄줄 흘린다. 이 모순적 장면은 그녀 내면의 혼란과 위선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이디스는 스토너에게 비아냥의 칼날을 던진다. “당신의 귀여운 여학생이 기다리다가 화를 내지 않겠어요?” 이 표현은 단순의 질투의 토로가 아니라, 비꼬는 어조와 냉소가 깔려 있다. 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관계 파괴의 언어적 무기다.

그녀는 계속해서 공격한다. “내가 당신의 그 가벼운 연애 놀음에 대해 모르는 줄 알았어요? 세상에,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디스는 ‘연애놀음’이라는 단어로 스토너와 캐서린의 사랑을 깎아내린다. 그것이 두 사람에게는 삶의 유일한 빛이지만, 이디스의 입에서는 단순한 스캔들로 축소된다. 언어가 얼마나 잔혹하게 상대의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디스는 스토너와 결혼 생활 내내 그를 무시하는 습관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내 곁을 떠나는 것뿐인데, 당신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

이 대사에는 스토너는 무능하고, 그녀를 떠날 용기도 없고, 그래서 영원히 그녀의 곁에서 무력하게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비아냥 섞인 단정이 압축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녀는 스토너를 배우자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자기 권력 아래 묶여 있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멸시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녀는 스토너의 존재 기반을 침해하는 폭력을 주저 없이 행한다. 이디스는 일꾼을 고용해 그의 책과 옷가지, 서류들을 무참히 거실 한구석에 쌓아 버린다. 이는 단순히 물건을 옮긴 행위가 아니라, 스토너를 지적 주체이자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디스는 도피로써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녀의 태도와 습관, 그리고 스토너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 전반을 결정짓는다. 그녀의 도피로써의 선택은 진정한 해방을 찾지 못한 채 새로운 굴레를 쓰게 된다.

스토너는 문학을 통해 내면적 성찰과 고요를 추구하는 인물이었지만, 이디스는 화려한 변화, 자유로운 활력을 갈망했다. 그러나 결혼 이후 마주한 현실은 조용하고 절제된 일상뿐이었고, 그녀가 원했던 탈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혼으로 도망쳤지만, 그녀는 여전히 억압의 그늘 속에 있었다. 단지 아버지라는 가부장의 그림자가 남편 스토너라는 새로운 존재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이디스의 도피로써의 결혼은 결국 딸 그레이스에게 커다란 대가를 안긴다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결국 아버지 스토너의 제자와 원치 않는 임신으로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된다.

그레이스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이를 갖게 되고, 사회적 압박 속에서 서둘러 결혼한다. 이는 주어진 상황에 떠밀려 도피하듯 선택하게 된 결과였다. 이 장면은 어머니 이디스가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피 결혼을 했던 모습과 거울처럼 닮아 있다.

그레이스의 남편 프라이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했고,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프라이는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젊은 가장이었지만, 현실 도피적인 충동 속에서 전쟁터를 택한다.

그레이스는 어린 나이에 원치 않은 임신을 통해 어머니의 억압적인 집을 떠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어찌 보면, 프라이는 그레이스가 자신의 집을 탈출하는데 필요한 도구였다.

로망의 대물림

도망치듯 맺은 사랑

굴레로 다시 태어나고

탈출이라 믿은 결혼은

비극을 물려주고 말았네

스토너:존 윌리엄스 지음/김승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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