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에서 슬론이 스토너를 만나서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라고 말하자, 스토너가 묻는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러자 슬론이 답한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슬론이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연애 감정이 아니라, 스토너가 문학에 빠져드는 몰입과 경외심을 뜻한다. 슬론은 스토너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까? “지혜는 머리에서 시작되지 않고, 가슴의 열정에서 피어난다.”
나는 이 대목을 보면서, 불현듯 지혜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싶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y)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을 해야지만,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사랑이 없다면 지혜는 단순한 정보이며 메마른 지식에 머문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내면화하며, 삶으로 옮기려는 열정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지식은 단순한 머릿속의 소유가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 곧 지혜가 된다.
사랑은 몰입의 불씨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해는 얕고, 기억은 사라지며, 탐구는 의무에 그친다. 하지만 사랑이 있으면 고통조차도 배움의 일부가 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지속된다.
사랑은 지혜의 필수 조건이라기보다는, 가장 강력한 길이다. 두려움으로도 지혜에 이를 수 있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세상을 알아가는 경우처럼. 필요로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생존으로 배운 것도 결국 쌓여서 지혜가 된다. 그러나 사랑을 통한 배움은 가장 순수하고 오래 지속되는 지혜를 낳는다.
두려움은 흙을 갈라 씨앗을 억지로 심는다. 필요는 물을 흩뿌려 씨앗을 키운다. 그러나 사랑은 햇살처럼 따스하게 씨앗을 감싸며, 그 뿌리를 깊고 단단히 내리게 한다.
스토너는 문학에 대한 사랑을, 마치 금지된 욕망처럼 몰래 간직한다. 그것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실용적 지식만을 기대받던 그에게 일종의 배반이었다. 그러나 숨김은 오래가지 못한다. 스토너는 문학 속에서 자신의 심연과 조우하고, 단어와 문장의 결합에서 삶의 의미를 더 선명히 보게 된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비밀의 방에서 몰래 빛을 붙잡듯이 책을 파고든다. 이윽고 그는 대담해져서, 세상이 뭐라 하든 문학의 세계 안에서만큼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신한다. 마침내 문학을 삶의 전부로 받아들이며, 부끄러움 대신 자부심으로 문학을 자신의 운명처럼 선언한다.
스토너는 삶의 어느 국면에서도 크게 환희를 드러내는 인물은 아니지만, 연구 계획 단계에서의 설렘만큼은 예외였다. 고전 시대와 중세 시대 라틴어의 영향, 언어와 문학이 서로를 비추며 이어지는 지적 계보를 파고드는 그 계획은, 그에게 단순한 학문적 의무가 아니라 세계가 열리는 관문이었다.
눈앞에서는 끝없이 이어진 가능성의 길이 펼쳐지고,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환희의 불꽃이 타올라, 평소에 차분했던 스토너마저도, 너무 들뜬 마음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스토너에게 이 순간은 문학과 언어라는 연인을 만나기 직전의 기대와 떨림이었다.
한편, 스토너는 자기 삶이 과연 의미가 있었는지 회의하면서도, 동시에 문학을 통해 얻은 깨달음 덕분에 그 회의 자체를 관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삶은 덧없고 보잘것없을 수 있지만, 그 덧없음을 직시하는 눈이야말로 문학이 그에게 선물한 지혜였던 것이다.
슬론이 말했던 것처럼, 스토너는 사랑에 빠져 문학을 붙들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순한 열정에 머무르지 않고, 비극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로 승화되었다. 스토너가 얻은 지혜는 화려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지도 않지만, 자신의 삶을 마지막까지 온전히 바라보게 해 준다.
스토너는 교단 위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전하면서, 단순히 가르치는 행위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강의 속에서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한다. 슬론이 처음 그에게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빛을 보여주던 순간처럼, 매 수업마다 그는 또다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그 과정에 자신 안의 변화와 성숙을 자각한다.
스토너의 삶은 위대한 업적이나 명예로 채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그는 그 일에 큰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조용한 애정과 충실한 헌신을 쏟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한다.
스토너에게는 힘든 난관이 계속 기다리고 있지만, 스토너는 문학을 사랑했기에, 자신의 난관을 인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문학은 그에게 삶의 고통을 말할 수 있는 언어, 사유할 수 있는 프레임을 준다. 그래서 그는 젊은 동료들의 단순히 학문적 성취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혜의 층위를 지니게 된다.
스토너는 죽음을 앞두고 독백한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스토너는 평생 문학을 사랑하며, 가르치고, 삶의 고통과 무게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자신이 붙들었던 지혜라는 것이 허상처럼 흩어짐을 느낀다. 긴 세월의 끝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지혜의 완성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의 심연이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삶을 성찰했고,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깨닫는다. 인간의 지식은 유한하고, 삶의 본질은 끝내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은 지혜의 길은 그를 무지의 자리로 이끌었고, 그 무지는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겸허한 진실이었다.
지혜의 문은 사랑으로
지혜는
차갑고 머나먼 별 같아
손을 닿으려 하면
허공 속에서 부서진다
그러나 사랑이 오면
가슴은 불타오르고
그 불꽃에 비친 길 위에서
지혜는 스스로 걸어온다
머리로는 닿지 못하는 것
사랑의 눈물과 기쁨 속에서만
비로소 얼굴을 내민다
사랑 속에서 길러진 지혜는
강물처럼 흐르며
삶을 적신다
스토너:존 윌리엄스 지음/김승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