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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배워보기

-나이를 이야기하지 않고 도전하기

by 시나브로 모모

아들이 처음 자전거 탄 때를 기억하는가? 많은 부모들이 이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 아이들은 모르겠고, 내가 처음 자전거 탄 때를 기억한다.


나는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겁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튜브없이는 무릎 깊이의 물일지라도 들어가지 않았고, 자전거는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스무살에 운전면허를 땄지만 15년 넘게 단 한번도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릎이 까질 일도, 뼈가 부러질 일도 나에겐 일어나지 않았다.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내가 위험을 맞닥뜨릴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 둘을 낳고 나의 인생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스트라이더를 시작으로 두발 자전거까지 생각보다 아이들은 빠르게 나를 앞서갔다. 한강 산책길에서 나의 잰걸음으로도 세남자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세 남자가 나를 위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거나 내가 빠지겠다고 손을 들어버리는 일이 늘었다. 우리 가족에게 서로 배려와 눈치 사이를 오가는 긴장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땅에서, 물에서 두 발을 떼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안전"하고 "평온"하게 무탈한 삶을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주저하고 망설일 수가 없는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둘째가 자전거를 씽씽 타며 나를 앞서가고 한강변에 홀로 남겨졌을 때 결심했다.

'그래, 이제는 시작해야겠어.'

불편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릴 수 없는 것이, 나로 인해 식구들이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이, 그래서 나는 서른 일곱살에.. 뒤늦게 발을 뗐다.

월드컵 공원에서, 망원유수지에서 연애 때도 해보지 않은 자전거 잡아주기를 남편이 시연하며

멀리서 보면 로맨틱한데, 가까이서 보면 위기의 부부로 그렇게 몇 개월을 씨름했다. 서울 골목골목은 오토바이와 킥보드,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반쯤 걷고, 반쯤 자전거를 타면서 뒤뚱뒤뚱 진땀 빼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다같이 행주산성 가보자!" 멋모르고 따라나선 자전거 라이딩~~

바구니 자전거를 타고 남편 뒤만 바짝 쫒으며 씽씽 지나가는 사이클 선수급 사람들에게 쫄기도 하면서 처음으로 장거리 자전거 타기였다. 신기하게도 그 다음부터 나는 정말 "잘" 타게 되었다. 앞에 사람이 보여도 긴장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고, 도로 옆길도 쫄지 않고 페달을 밟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자전거를 탈 때 내 뺨을 스치는 살랑 바람의 청량한 감촉을....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나의 발로 페달을 밟고 속도를 내며 나아갈 때의 자유로움과 알 수 없는 쾌감을.... 그것은 내 몸이 마음 어딘가와 연결되어 느끼는 또다른 아름다움과 평온함의 감각이었다. 이전에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몸이 주는 정직하고도, 명료한 살아있다는 감각이었다.

나는 행복해졌다. 가족들과 나란히 달릴 수 있어, 눈치보지 않고 함께 추억을 가질 수 있어 즐거워졌다.

그래서 나는 물에서도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육아휴직 기간이었던 그 때, 남편이 새벽에 나가 번호표를 뽑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청소년수련관 수영장에서 나의 첫 수영을 시작할 수 있게 밀어 주었다.(나를 밀어버린 것에 가깝다) 생각은 있었지만 누군가 등떠밀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 힘들어하는 나였기에 이런 나의 성향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남편이 있어 다행이다. 그렇게 나의 발차기 인생이 시작되었다. 물에 얼굴을 처박아야 한다는 것부터 난관이었던 나는 킥판 없이는 물에 뜰 수 없으리라는 확신 속에서 '나는 안될거야, 난 원래 물 공포증이 있어'라는 자기신념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물에 뜬다는 당연한 사실이 나에게는 예외라고 믿으며 부정하는 '나'를 극복해야만 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3년의 수영 강습과 1년 반 정도 자유수영을 해 오고 있는 현재를 기준으로 나는 여전히 물이 무섭다. 처음 발을 물에 담글 때의 차가움과 코로 숨을 쉴 수 없는 물 속에서의 압박에 여전히 힘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무바퀴를 채운다. 느리든 빠르든 그저 내 속도와 내 컨디션에 맞춰 스무바퀴를 돈다. 두 발을 바닥에서 떼고 팔을 돌려 물속에서 내몸이 앞으로 나아갈 때,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려 밭은 숨을 내쉴 때, 가빠오는 숨에 그만할까 싶은데 벽을 다시한번 힘껏 차고 한바퀴 더 돌았을 때 나는 희열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시나브로 물과 친해지는 중이다.

자전거 타기와 수영하기, 이 두 활동은 내 몸이 내 마음의 회로와 직접 연결돼 긴장감 속에서 열정 버튼을 누른다. 분명히 몸의 에너지를 사용했는데 더 큰 에너지가 생산되는 것 같은 풍요로움이 차오른다.

그 충만함은 지금껏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나는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듣고 배우는 정신적인 삶이 전부였다.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은 극히 일부의 신체적 활동이다. 그것도 정신적 활동을 위해 불가피하게 할 수밖에 없는...손가락을 움직이고 걷고, 서고 앉는 정도의 크지 않은 움직임....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몸을 움직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작년 겨울에는 스키를 처음 탔다. 추운 것이 제일 싫고, 무겁고 불편한 장비까지 장착해야 하는 번거러움의 끝판왕인 스키... 거기다 고소공포증과 빠른 속도를 극도로 무서워하는 나의 성향상 스키는 정말 타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동네 친구가 가족들과 함께 나를 들어 올린다. '할 수 있다고, 우리도 처음이니 같이 타보자고!!'

그렇게 40대 세 사람이 처음으로 스키를 탔다. 엉덩방아를 찧고, 눈속에서 뒹굴면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넘어지지 않고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올해도 스키장에 갔고 중급 정도는 웃으면서 속도를 즐기며 내려올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멋있는 폼도 아니고 잘하지 못한다. 하지만 A자로 내려오든 S자로 내려오든 우리는 스키가 주는 쾌감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몰랐던 스키를 신고 눈비탈을 내려올 때의 충만함을 내 몸이 느끼고 정신까지 풍요롭게 채워준다.

나이가 들면서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은 멀리하게 된다. 젊었을 때도 안한 걸, 굳이 나이 먹어서 뭣하러.. 라는 말을 한다. 특히 몸으로 하는 건 더더욱 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겁은 더 많아지니까. 그래서 몸으로 배우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몸으로 배우는 것은 진짜 내것이고, 정직하니까. 지름길도 없고, 꼼수도 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 아들들의 자존감이 올라간다. 엄마가 잘 못하는 것, 서투른 것을 보면서 어른이라고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 그렇지만 어른이라도 배우면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기꺼이 나를 가르쳐 준다. 나와 속도를 맞춰 자전거 페달을 밟고 스키를 타고 내려오며 "엄마, 잘하고 있어! 화이팅!!"이라고 격려해 준다. 나는 고마워진다.

배움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그래서 남과의 비교가 무의미해진다.

나는 몸으로 배우면서 "나"를 알게 되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히려 성장하지 않아도 매번 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이 충만해질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만약 나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공허함과 우울함이 몰려 온다면 "몸을 움직여라!"

생각과 감정의 과잉으로 지쳐있는 자신에게 몸의 활력을, 에너지를 공급해 주면 어떨까.


덧붙임)

이렇게 40대에 첫걸음을 뗀 초보스키어들이 서로 응원하며 기뻐하고 있을 때 상실감에 빠진 한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남편... 그는 20대 때 스노우보드를 타고 점프하고 날아다녔던 화려한 기술을 뽐냈던 과거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 15년 만에 다시 스노우보드에 올라타고 트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자신의 운동 능력이 20대와 다르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그는 보드를 타고 내려오면서 나이들어버린 자신의 몸뚱아리가 상상 속의 현란함을 절대 따라갈 수 없음을 갑작스럽게 통보받게 된 터였다.

그렇다. 몸은 그저 담담하게 말해 준다. 그 시절의 우리는 아름다웠다고... 지금의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써야 한다고... 그러니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예전의 것을 놓아주고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는 훈련의 연속일지 모르겠다.

배운 것을 놓아주어야 하는 자와 새롭게 배운 것을 잡고 있는 자 모두 저마다 고군분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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