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함께 시를 읽자.
올해 김소월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뮤지컬 공연이 있다고 해서 보러갔다. 김소월 시를 읽어본 적도 없고, 뮤지컬은 타요가 마지막이었던 아들들과 시를 다룬 뮤지컬을 잘 감상할 수 있을까.
둘째의 일기장을 잠시 들여다 본다.
"내가 음악회 같은 데서 계속 자가지고 오늘은 아이셔추도 사갔다. 생각보다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상상이상이여서 재밌고 놀라웠다. 덕분에 잠도 않잤다. 그리고 김동현이라는 사람이 죽기 전에 다른 사람 대신 "내가 하얀 달이야"라고 했을 때 울었다. ('하얀달은 구름을 뚫고 진실을 밝힐 것이다'라는 대사가 있음)
아이의 글을 읽고 엄마가 느끼는 귀여움은 논외로 하고 국어교사로서 어떤 피드백을 해 줄 수 있을까? 11살 아이의 수준에서는 "유창하고 문법적으로 정확한" 쓰기보다는 감정과 생각을 "살아있는" 표현으로 쓸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글쓰기에 거부감 혹은 부담감을 갖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행위', 그래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대사를 얼마나 포착하는지, 관찰한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고 표현하는지에 주목한다.
예컨대 '않잤다'의 맞춤법을 지적하거나 고치게 하지 않는다. 대신 '하얀달'의 함축적 의미가 담긴 중요한 대사를 기억해 낸 것에 감탄하며 하얀달이 구름을 뚫고 진실을 밝힌다는 것이 김소월이 살았던 시대에는 어떤 의미일 거 같은지 물어볼 것이다. 나는 아이의 글을 평가한다. 그런데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아니 점수를 매길 수 있지만 점수를 왜 받았는지, 왜 깎였는지에 대해 아이가 이해하고 수정 보완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것이 평가를 하는 이유이고, 방향이다.
방학이 되고 일주일에 2번은 마포중앙도서관에 간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안희연 시집 3권을 쌓아놓고,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한다. 안희연 시인의 작품들을 읽노라면 슬픔과 고통이 스며들고 가라앉는 마음이 된다. 그런데 그 무게에 짓눌리진 않는다. 시련을 극복하자는 성장의 서사도 아니고, 앞으로 잘될 거라는 희망을 노래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와 단단함이 자리잡고 있다.
[빚진 마음의 문장-성남 은행동]에 나오는 한 구절에 내 생각이 머문다.
'유년'이라는 단어는 문이 많은 단어군에 속한다. 누구든 쉽게 열 수 있지만 막상 열고 나면, 과자통 속의 스프링 인형처럼 의외의 변수가 튀어나올 때가 많다. <중략> 나는 유년이라는 단어 하나가 거느린 세계가 이토록 거대하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한 단어가 거느린 숱한 고리와 고리와 고리, 그 끝을 계속해서 따라가다 보면 갈고리에 걸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 자신을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한 단어의 문을 연다는 것은 지금껏 발 들여놓은 적 없는 세계로 건너가는 일, 마음을 더는 안전한 곳에 둘 수 없는 일, 추락하기 좋은 자세를 배우는 일과도 같다.
나에게는 이 단어의 시작이 '평가'이다.
평가란 무엇인가? 우열을 가리는 것,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고 위치를 정해주는 것일까? 가능하다! 문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보편타당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에서, 인생에서 저마다의 성공기준과 행복의 의미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동일한 기준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그렇다면 평가란 무엇인가?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에게 피드백을 주는 행위, 즉 부족한 점을 드러냄으로써 수정하고 보완할 기회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이들마다 겪고 있는 문제상황, 이해 정도, 배우는 속도가 모두 다르다. 가르치는 사람은 그것을 '발견'해야 하고,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국어는 소통 능력을 키워주는 도구 교과로서 '과정'에 대한 평가가 아주 중요하다.
실제 모둠활동과 프로젝트형 과제를 통해 교사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언어 행위를 관찰하고 적절한 피드백을 하면 학생들은 변화한다. 친구가 아닌 자신에게 집중한다. 장점을 모방하기 위해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한다. 이 과정에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알아차린다. 이것이 바로 자기성찰 능력이고, 메타인지이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힘을 통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차이를 인식하고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현장에서는 배움과 평가는 분리되어 있고 점수가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점수'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내신점수와 등급싸움을 벌이는 순간, 어떻게 그 점수를 맞았느냐는 중요치 않다. 친구의 점수가 떨어지면 행복하고 내 점수가 상대적으로 높으면 만족한다. 동료 교사들은 평가의 공정성과 변별력을 요구하는 민원에 대한 불안으로 모둠평가나 프로젝트형 과제를 꺼려한다. 학부모들은 지필평가는 객관적이고, 수행평가는 '주관적'인 평가라며 교사의 역량을 믿지 못한다. 교육부는 '역량중심'교육을 지향하며 협업능력과 소통능력을 키워줄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입시에 큰 영향을 주는 수능 국어에서는 "화법과 작문"을 5지선다형 11 문제로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능력을 "평가"하는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다시 '평가'로 돌아와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평가란 무엇인가. 이 단어의 문을 열다보니 지금껏 안전하다고 믿었던 곳에서 멀어지고 있다. 추락하기 좋은 자세를 배우기 전에 추락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전의 '안전한', '익숙한' 곳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있어 평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질문을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여전히 입시라는 벽 앞에서, 평가를 위한 평가의 체제 속에서 혼란스럽고, 두렵다.
일관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이 정말 나에게 있는가? 그런데 완벽한 사람만이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어쩌면 '교사'에게 너무 많은 기대와 책임을 지우는 것은 아닐까?
평가는 배움의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는 동시에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래서 평가는 아이의 잠재력을 끄집어 내고 더 노력하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의 평가는 '누구보다, 어느 수준보다 잘하지 못한다'는 비교와 자책, 부끄러움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일이다.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삶 속에서는 불행배틀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평가'의 문을 새롭게 열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