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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Sep 23. 2023

고양이의 베란다

쓰기의 목적

 

 그럭저럭 노인네 반열에 들어선 것일까. 언젠가부터 주말 아침 6시만 되면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잠에서 깼다. 그토록 바꾸고자 노력했던 생활 습관의 개선은 의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이 듦에 따른 생체 리듬의 변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바뀌어갔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은 집안의 온갖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것이었다. 실내의 나쁜 공기와 냄새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일종의 등가교환 같은 것일까. 바로 옆 신축 아파트의 공사 소음이 집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베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옹이와 다옹이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금기의 영역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 화분과 작은 개미 친구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녀석들은 베란다를 좋아했다. 캡슐 커피를 내리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전원을 켜고 컴퓨터의 시동을 기다리며 문득 변화된 나를 발견했다. 보통은 일찍 깼어도 소파에 누워 유튜브나 보는 것이 고작이었을 텐데. 쓰기는 나를 성실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쓰는 일에 홀딱 빠져들었다. 마치 오랜만에 첫사랑과 대면한 것처럼 마음이 달떠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쓸 수 있는데 그동안 왜 안 쓴 거야. 아내는 반가움과 원망이 반씩 섞인 말투로 타박했다. 보는 일은 간소했고 읽는 것에는 일말의 에너지가 소모됐으나 쓰기에는 적지 않은 고민과 번뇌가 필요했다. 과거에도 분명 열성으로 읽고 쓰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쓰는 나',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쓰지 못했던 나'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자질의 문제는 아니었다. 있던 소질이 없어졌다가 갑자기 다시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 외부 요소가 내면으로 발동해 글을 쓰거나 쓰지 못하게 한 것이 자명했다. 처음에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에서 받은 업무 스트레스, 사람에 대한 증오와 환멸 같은 것이 뒤범벅되어 쓸 여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읽기와 쓰기에 가장 유리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휴양지에서 여유를 만끽할 때였을까. 아니면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감성적으로 충만했을 때. 집에서 종일 한가하게 쉴 때가 읽기 좋았을까. 내 경우에는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자의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수능을 준비하던 고3 때,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22살 무렵 가장 많은 소설을 읽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읽기와 쓰기는 도피와 안식의 공간이 되었다.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유의 몸부림을 독촉했다. 왜 한동안 쓰지 못했으며 이제는 쓸 수 있게 되었을까. 어렴풋이 내린 결론은 바로 읽는 사람, 독자의 존재였다. 김연수 단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의 문장이 생각나서 책을 펼쳤다.


 "그럼 할 말은 여기서 할게. 알래스카 코드로바에 마리 스미스라는 에야크 인디언이 살아. 이 지구상에서 에야크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인간이야. 사람들이 소감을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대. '그게 왜 나인지, 그리고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나는 몰라요. 분명한 건 마음이 아프다는 거죠. 정말 마음이 아파요.' 듣는 사람이 없으면 말하는 사람도 없어. 세계는 침묵이야. 암흑이고."


 몇 년 만에 소설 속 밑줄 표시해 놓은 문장을 다시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무엇이 나를 쓰게 했는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눈물의 의미도 아리송했다. 노트북을 다시 열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쓰는 중이야? 아니,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 중이야. 남의 글 읽는 시간에 여보 거 한 자라도 쓰는 게 낫지 않아? 읽는 사람이 있어야 쓰는 사람도 있는 거야. 소설의 문장을 인용해서 변형한 것이지만 나름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말했다. 품앗이 같은 거야?

 글을 쓰는데 책상 위로 다옹이가 올라왔다. 녀석은 사람을 좋아해서 어디든 졸졸 따라다녔다. 모니터 안 거칠고 조잡한 문장의 생성과 고양이의 얼굴이 중첩되어 한눈에 들어왔다. 고양이의 오묘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배경이 되어 내 조악한 글을 그럴싸하게 꾸며 주웠다. 고마워, 네 덕에 쓸 수 있게 되었어.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내 쓰기의 목적은 읽히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아옹이는 여전히 베란다에서 사색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일주일 동안 물을 주지 않아 시들어버린 재스민 나무에 물을 흠뻑 주었다. 생명을 다한 듯 힘없이 푹 처진 이파리는 금세 생기를 되찾았다. 재스민 꽃은 봄에 한 번 피는데 단 일주일뿐이었지만 그 향이 기가 막혔다. 향긋함을 넘어 지독하다고 표현할 만큼 향이 강해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 재스민 꽃이 다시 피기를 기다리며 베란다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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