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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Sep 26. 2023

둘 중 더 나은 상황은?

내 이름은 암스트롱

 

 휴일에 친구를 만난다고 나갔던 그가 이제야 집에 들어온다. 도어록의 숫자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 얼굴이 왜 그리 울상이야. 나만 집에 두고 놀다 왔으면서. 요 근래 그런 적 없었는데 또 우울병이 도진 건가. 그러고 보니 걸음도 패잔병처럼 무겁잖아.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는 묻는 말에 대답도 없이 창문부터 연다. 집 안으로 상쾌한 바람이 불어 들어와. 해가 부쩍 짧아진 걸 보니 벌써 계절이 옷을 갈아입나 봐. 서늘한 기운에 슬슬 춘추복 입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노트북 앞에 앉은 그가 인터넷에 접속해. 어느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읽고 있어. 둘 중 더 나은 상황은? 오늘 행복하지만 내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때, 오늘 우울하지만 내일의 행복이 보장되어 있을 때. 당연히 후자지. 그가 흥분해서 열변을 토해. 언제 적 군시절 얘기를 또 하고 있어. 수십 번도 더 들은 이등병 때 얘기. 일요일에 외출을 나가는 대원이 있으면 내무실 사람들에게 로또 복권을 하나씩 사다 주는 게 전통이었대. 꼭 일요일이어야만 했대. 그래야만 돌아오는 토요일 저녁 8시 45분, 다음 추첨일까지 오래오래 단꿈에 젖을 수 있으니까.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매일 밤 1등에 당첨되는 상상을 하며 고된 몸을 누였대. 비록 허황된 꿈이어도 상관없었다지. 허상이라도 간절히 붙들고 버텨야 할 만큼 힘들었다니까. 뭐, 어린 왕자? 거기까지 가는 거야?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그 명대사는 나도 잘 알지. 인간은 현재보다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만약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불타는 금요일 오전보다 일요일 오후가 더 행복해야 되는데 그런 직장인이 어디 있냐. 그래서 오늘 비록 힘들어도 내일의 행복이 보장되어 있을 때 더 만족을 느낀다. 이게 그의 주장이야. 알았으니까 침 좀 그만 튀겨. 더러워 죽겠네. 근데 혹시 너 지금 일요일 저녁이라 기분이 꿀꿀한 건가? 내일 출근할 생각에 기분이 더러워진 거야? 에라, 이 바보아!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아. 뭐 하러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일 일까지 걱정하고 있어. 지금 염려하고 끙끙 앓고 나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니. 우리가 걱정하는 일 중 40%는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는대. 30%는 이미 일어난 일이고 22%는 사소한 것이래. 걱정의 4%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겨우 4%만이 바꿀 수 있다는 말, 못 들어봤어! 내일의 걱정은 내일의 너에게 토스해 버리라고.


 새벽에 깨면 난 물부터 마셔. 이건 당신에게도 권하고 싶어. 자는 동안 몸 안에 축적된 독소와 노폐물을 배출시켜 주거든. 몸을 상쾌하고 활력 있게 만들어 준다고. 그러고 나서 기지개를 멋들어지게 켜지. 여기 나보다 유연한 사람 있으면 손 한 번 들어봐. 요가 암만 해봤자 이 몸한테는 어림도 없지. 그럼 발톱을 한 번 갈아볼까. 이렇게 매일 긁어 줘야 죽은 외피가 벗겨지고 새 발톱이 나오거든. 스크레쳐가 있긴 하지만 기분 전환 좀 할 겸 소파에 긁어 볼래. 발바닥의 페로몬을 묻혀 영역 표시 좀 해야겠어. 다음 향하는 곳은 화장실이야. 이런, 화장실 청소가 엉망이네. 불결한 건 질색인데. 일하는 사람을 바꿔야 되나 봐. 한 번 맺은 정과 의리 때문에 그냥 두긴 하는데,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니야. 조만간 불러서 야단을 좀 쳐야겠어. 내 진짜 이름은 암스트롱이야. 아옹이 따위가 아니야. 딱 들어도 기품과 강인함이 느껴지지 않니.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어원은 강력한 전투기라는 뜻이야. 용맹한 고양이가 되라고 어머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의 표면을 밟은 사람은 닐 암스트롱이야. 주파수 변조 라디오를 발명한 에드윈 하워드 암스토롱이란 사람이 있지. 위대한 재즈 트럼펫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은 많이 들어봤을 거야. 아옹이라니. 아기 고양이 이름에 옹이란 단어가 가당키나 해. 감자 옹심이도 아니고. 나름대로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라니까 요냥조냥 쓰긴 하는데 맘에 썩 들진 않아. 알람이 울린다. 곧 그가 일어나겠어. 거실로 나오자마자 내 몸에 제 얼굴을 비비는 것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저 모지리 좀 봐. 내의를 또 뒤집어 입었잖아. 하는 일마다 왜 저렇게 엉성하고 빈틈이 많은지. 우리 집 아픈 손가락. 애잔한 마음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니까. 어제는 그렇게 죽상이더니 출근은 일찌감치 하네. 거봐, 이 친구야, 닥치면 다 하게 된다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물 흐르듯 사니까 너무 노심초사하지 말라고. 야생에서 생활하신 내 고조부의 고조부의 고조부님은 내일의 걱정 따위는 없는 분이셨어. 순간순간이 치열한 전쟁이었지. 그저 한 끼 해결하고 몸 누일 공간만 있으면 만족하며 살았지. 너처럼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사셨단 말이야. 자, 잔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이 둥글둥글한 자태에서 풍기는 귀여움을 보고 힘내라고. 사료 값은 해야 되니까.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보다 더 멋진 소리를 들려주지. 귀에 잘 담아둬. 야아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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