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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Dec 21. 2023

서른

Happy New Year

 이것은 10년도 훌쩍 넘게 지난 서른 살의 이야기이다. 이제 와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나조차도 의문이다. 다만 한 번쯤은 사과하고 싶었다. 근심과 번민으로 허우적거렸던 과거의 나에게. 그리고 그 시절 덜 여물었던 나를 훑고 지나쳤던 모든 사람들에게.

 

 도심 어딜 가도 흘러나오는 캐럴이 크리스마스가 도래했음을 알려 주었다. 성탄절과 연말연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해 거리는 들떠 있었다.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종종걸음을 놓았다. 내게는 없는 분주함과 열기가 못마땅해서 괜히 심통이 났다. 대리님도 내년이면 서른 아니세요? 서른 살이 되면 기분 묘하다던데, 정말 그래요?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온 여직원 둘이 작은 새처럼 쉬지도 않고 조잘거렸다. 글쎄요, 전 아무 느낌도 없어요. 태연한 척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수선한 현실에 뒤숭숭했다. 인생에서 서른이면 한 번쯤은 중간 점수를 확인하고 재정비한 후 다음 여정을 준비해야 했다. 송구스럽게도 내 중간 점수는 0점이나 다름없었다. 서른을 앞둔 나는 이렇다 할 현실적 기반도, 이상의 성도 세우지 못했다. 나이 앞 자리의 숫자가 바뀔 때가 되자 친구들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한참 뒤처진 현실에 대해 직시해야만 했다. 다소 과장해서 어깨에 힘을 주고 회사가, 결혼이, 주식이, 아파트가 이러니저러니 하는 얘기를 듣는 것은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껏 열심히 획득한 점수를 과시하는 친구들에게 악의는 없었겠지만 낙오자를 향한 배려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 남은 마지막 남자 동료마저 퇴사하자 드디어 나는 번역사업부의 청일점이 되었다. 위에 과장, 부장들은 모두 사측 그룹과 싸우고 퇴사했다. 그들이 하던 중간 관리자의 업무를 누군가는 맡아야만 했다. 승진을 포함한, 업무 분장을 앞둔 시기가 다가오자 친밀하게 지내던 직원들의 태도는 돌연 바뀌었다. 입사는 늦지만 내가 승진할 거란 소문이 돌았다. 허물없이 지내던 여직원들은 거리를 두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적개심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애초에 승진을 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미움을 사야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질 때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나로서는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알게 모르게 별개의 집단을 형성하고 라인을 꿰차고 있었다. 정당의 소속을 득하지 못한 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매번 낙선하던 어느 후보자처럼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청일점이 되고 나아진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젠더 영역에서마저 배격되었다. 정치와 선동, 이간질과 편 가르기가 난무했다. 심약한 나는 결국 사람을 미워하는 법을 배우고야 말았다.


 내 초라한 서른을 맞이한 곳은 입원실이었다. 난생처음으로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 퇴근 직전에 개인 휴지통을 비우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데 찌릿한 통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전에 없던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적의를 감출 의도가 없는, 노골적인 고통이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한참을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나름 심각한 상황인데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의 무관심 덕에 어쩌면 별일 아닐 수도 있을 거란 기대를 하게 되었다. 차마 응급실로 향하지 못하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길 바랐다. 하지만 아침에 나를 맞이한 건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는 불능이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골반을 들어올릴 수 없었다. 119에 전화해 구급을 요청했다. 낮이었음에도 세상은 온통 암전이었다. 병원에 도착해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다.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물을 투여하자 겨우 허리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낮에는 물리치료와 재활치료를 받았다. 몇 번이나 주저하다 간호사에게 빌린 종이와 볼펜으로 병실에 누워 이것저것 끄적거렸다. '서른이 되던 해 세상은 나를 낙오자의 대열에 편입시켰다.' 허름하고 시시했던 이십 대를 결산하는 문장으로 심히 적절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병원에 오지 않으셨어요? 그동안 전조 증상이 계속 있었을 텐데요. 의사는 세상에 갑자기 생기는 일은 없다고 했다. 어떤 일이 생기기 전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기미가 보이거든요. 화산이 폭발할 때도 먼저 지진이나 가스 분출 같은 조짐이 발생하잖아요. 환자분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지 몸은 계속 아프다고 신호를 보냈을 거예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멀뚱하게 뜬 채 왜 내게 이런 비극이 생겼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포착하지 못한 불행의 조짐은 과연 몇 번쯤이었을까. 파탄의 원흉은 나 자신임이 분명함에도 애써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고민 끝에 직장에 그만둘 것을 통보했다. 차라리 후련했다. 어차피 사직할 거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라고 위로했다. 퇴사한다는 낭보가 돌자 그제야 직원들이 병문안을 왔다. 모두가 돌아간 깊은 밤중에 깨어 복도 유리창에 비친 새까만 얼굴을 보았다. 더러운 거울 속에는 한 마리 상처 입은 들짐승이 가야 할 바를 알지 못해 서성이고 있었다.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고 겨우 실루엣만을 응시했다.

 

 퇴원하는 날 엄마에게 전화해 디스크로 인해 입원해 있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엄마는 잠시 울먹이더니 이제 그만 내려와 고향에서 정착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이미 내린 결정에 동의만을 기다리듯 엄마의 말이 내 결정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서울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짐은 단출했다. 대부분 버릴 것들이었고 부피가 있는 짐은 옷가지와 책뿐이었다. 무게와 부피가 상당한 문예지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박스에 담았다. 문학과 지성사의 계간지를 펼쳤다가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소설 쓰기 강좌를 발견했다. 평소 동경하던 소설가 겸 교수가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직장도 그만두었겠다 두 달 정도 일탈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어차피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고향으로 향했던 행선지는 돌연 변경되었다. 느닷없고 대책 없는 결정이었지만 서른을 맞이하며 일어난 일들은 다 현실감이 없었다. 병원에서 쓴 문장이 내 첫 소설의 도입부가 되었다.

 첫날 수업은 나를 당혹감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전공자도 더러 있었고 오랜 시간 글을 쓰며 내공을 쌓은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당황한 진짜 이유는 수강생 중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이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라 보고 놀란 마음으로 솥뚜껑을 발견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딜 가나 외돌톨이구나. 다행스럽게도 그녀들은 자기의 글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오히려 극도의 편안을 가져다주었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어서 강사님과 함께 새벽이 다 되도록 술을 마시며 소설 이야기를 나눴다. 첫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새벽의 첫차는 수험생, 일용직 근로자, 회사원들로 가득찼다. 그들이 내뿜는 입김 속에는 생을 향한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느끼지 못할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첫 과제가 주어졌다. 르네 마그리트의 붉은 모델이란 그림을 보고 짧은 글을 지어 오라고 했다. 그림은 신발과 발을 합성한 듯한 초현실적인 작품이었다. 발이기도 하고 신발이기도 한 기괴한 형상.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동일 대상에 대한 상반된 태도가 동시에 존재하는 양가성이란 성질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저것이기도 한. 양가성은 어떤 하나의 것을 원하는 감정과 그 반대의 것에 끌리는 감정이 끊임없이 교대하는 상태를 설명했다. 생활과 예술의 공생을 원하는 나. 낮이면서도 어둠인 세상. 안정과 변화를 동시에 갈망하는 낙오자. 그림의 역설과 모순이 나의 서른과 흡사하게 느껴졌다. 어떤 글은 몇 날 며칠을 붙잡고 있어도 진전이 없는 반면 어떤 이야기는 첫 문장만 뽑아내도 몇 분만에 술술 풀렸다. 내가 써 낸 글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사님은 강평을 진행했다. 문장도 좋고, 서정과 서사가 적절히 공존하는 글이라고 호평했다. 정작 생의 서사와 드라마는 서른에서 멈추었는데 아이러니했다. 정리해 놓은 이삿짐을 풀기 번거로워 상자가 쌓인 방에서 첫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름도 없는 그냥, 남자였다. 익명성의 세상이 오자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이름이 필요 없었다. 키보드를 두들기다 지루해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Happy New Year! 중간 점검으로 인한 정체가 끝나고 고단한 행군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미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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