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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Oct 07. 2023

신나는 잠

오늘은 울기 좋은 날

 

 6일간의 긴 연휴를 마치고 출근했다. 업무가 발 디딜 곳 없이 폭탄처럼 쌓여 있었다. 월초와 4분기의 시작이 겹쳐서 결산과 정산, 신고의 업무가 태산이었다. 거기에다가 연휴 동안 밀렸던 제품의 주문이 폭주했다.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끝내야 할 일은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하나의 일을 미처 마치기 전에 새로운 업무가 생겨났다. 동시에 여러 가지의 일을 할 경우 실수가 나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노동의 높고 높은 산을 손바닥만 한 삽으로 파서 치워 내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도중에 쓰러진다고 해도 삽질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리던 시시포스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힘들게 올린 바위가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가기 때문에 그는 영원한 형벌 속에 갇혔다. 나만 이렇게 바쁜 건지, 다들 똑같이 막중한 짐을 짊어지고 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기가 부서질 정도로 세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일장 욕지거리를 내뱉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속이 시원해질까. 다른 전화기로 교체하는 시간에 일은 더 쌓일 것이었다. 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어서 내게도 노동의 형벌을 지게 했을까. 분풀이할 대상을 애써 찾았다. 누구든 걸리기만 해 봐라. 가루가 되도록 물어뜯어 잘근잘근 씹어먹겠다. 빨리 집에 가서 다 접고 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다. 시계를 보고 퇴근 시간까지 끝낼 수 있을지 가늠했다. 어림없어 보였다. 째깍. 시계가 아니라 시한폭탄에 달려 있는 타이머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름이 갑자기 빠르게 느껴졌다. 갑자기 공황장애가 올 거 같아 심호흡을 했다. 세 잔이나 들이켠 커피 때문인지 심장 박동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쿵쾅! 혹시 한바탕 울고 나면 기분이 달라질까. 주위에 보는 눈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감정은 이미 울 준비를 끝냈고 온 스위치만 누르면 되었다. 우는 스스로를 인식하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이 나이에 울기는 좀 애매했다. 영아의 울음은 본능적으로, 유소년의 울음은 순수하게 그려졌다. 청년의 울음은 성장통을 견디는 아름다운 눈물로 다가왔다. 40대의 울음은 왠지 나약하고 낯간지러운 자위 같았다. 만약 우는 도중 누군가 들어온다면. 하품을 했다고 해야 하나. 결국 울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나이가 되었다. 째깍.


8,075 × 354 =  

2,142 ÷ 34 =

 초등학교 2학년까지 주산 학원에 다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판알을 튕기며 엇비슷한 계산 문제를 수도 없이 풀었다. 유독 집중이 안되고 하기 싫은 날이었다. 왜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한 번 의혹이 찾아오자 불신은 풍선처럼 부풀어 결국 의지를 꺾었다. 선생님, 학교에서 시험 볼 때 주판으로 계산하면 안 된대요. 주판으로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나중에는 암산으로 풀 수 있게 돼.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말했다. 주판으로도 하기 싫은데 머릿속으로 이 짓을 계속해야 된다고? 선생님, 앞으로는 컴퓨터가 다 계산해 준대요. 순간 선생님이 눈을 흘기더니 문제집을 가져갔다. 풀어야 할 문제의 할당량이 늘었다. 다 풀고 답안 검사를 받았다. 빨간 색연필로 정답과 오답을 체크했는데 반은 넘게 틀렸다. 두 번째 검사 때 거기서 또 절반을 틀렸다. 난 벌써 다 풀었는데 넌 참 느림보구나. 내가 풀어줄까? 나보다 더 늦게 온 친구, 짠지가 옆에서 속을 긁었다. 이걸로 널 때리면 주판이 부서질까, 머리통이 부서질까? 아니, 넌 느림보라서 난 다 피할 수 있지. 넌 태권도도 못하잖아. 꽤 섬뜩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연신 깐죽거렸다. 계속되는 도발에 별 반응이 없자 짠지는 주판을 양 발로 밟고 스케이트를 탔다. 스케이트맨이 선생님한테 걸려 구레나룻을 잡히는 장면을 보고 겨우 기운을 냈다. 짠지마저 태권도장에 가고 고학년들이 들이닥쳤다. 학원에 온 지 3시간은 족히 지났다. 연필로 쓴 오답을 지우개로 지웠다가 다시 새 답을 쓰고 틀려서 또다시 지우개로 지웠다. 교재는 이미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책상 위에 즐비한 지우개 가루를 손바닥으로 뭉쳐 있는 힘껏 던졌다. 가볍고 힘이 없는 지우개 똥은 멀리 날지 못하고 땅으로 고꾸라졌다. 그만 엎드려 울고 말았다. 소문난 울보이기는 했지만 학원에서 운 것은 처음이었다. 절반은 힘들어서였고 반은 혹시나 울면 그냥 보내줄까 해서였다. 야! 나도 힘들어. 왜 사람 짜증나게 하고 난리야. 눈물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철의 심장을 가진 여자였다. 문제를 다 풀기 전까지는 학원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기는 결국 문제 해결이 아닌 지연의 도구일 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온 군인처럼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 소자는 주산과는 적성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태권도로 전향하길 바라니 숙고하여 주십시오. 태권도장으로 가자. 거기 가서 합법적으로 짠지를 두들겨 패자. 어머니는 내 삐뚤어진 욕망을 발견하였는지 태권도장이 아닌 피아노 학원으로 나를 보냈다.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다옹이만 신발장 앞에 마중을 나왔다. 아옹이는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평하게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아옹이처럼 살고 싶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일찌감치 잠을 청할 준비를 했다. 오늘 하루 파김치가 되도록 일한 보상이었다. 아옹이가 자는 중에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어쩌면 녀석은 사냥하는 꿈을 꾸는 중일지도 몰랐다. 인간은 수명의 삼분의 일을 자는 데에 사용했다. 고양이는 인간보다 두 배 더 자는데 포식자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수면의 질은 낮았다. 인간과 고양이 모두에게 잠은 휴식과 치유를 의미했다. 잠을 자는 동안 신체 활동은 중지되고 회복과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었다. 심각한 외상이나 정신적 충격을 당했을 때 잠은 신체 회복과 고통 완화가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은 비교적 더 큰 행복감을 느꼈다. 잠이 직접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을 긍정적으로 편향시켜 행복하게 느끼도록 도와주었다. 오늘 시궁의 바닥 같은 곳에서 있었던 더러운 일은 전부 잊자. 잠은 내게 울음과 의미를 같이 했다. 단순한 도피가 아닌, 내면의 돌봄과 고침이 작동하는 의식이었다. 침대에 눕기 직전에 잔나비의 신나는 잠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신나는 잠이 비로소 내 하찮은 노동을 고귀하게 만들었다. 오늘 영업 끝! 더 이상 째각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았다.

 

 밤의 파수꾼 오 그대여 내게로 와주오. 노랠 부르며 은밀하게 포근히 와주오. 비단옷을 입고 돌아온 고향 나의 침대여. 손을 들고 환영해 주오. 잠들자. 신나는 잠. 이불을 턱 끝가지 차올리면서. 내쉬는 고귀한 한숨이 있는 곳. 잠들자. 밤의 목자여 이 밤에도 쉴 틈이 없구려. 잠시 쉬시오. 내가 대신 헤아려 보리라. 비단옷을 입고 돌아온 고향 나의 침대여. 손을 들고 환영해 주오. 잠들자. 신나는 잠. 이 밤도 한바탕 실랑이 끝에서. 화해를 청하며 스스로 내민 손. 탐탁지 않던 하루와 극적인 타협의 순간. 잠들자. 신나는 잠. 이불을 턱 끝까지 차올리면서. 내쉬는 고귀한 한숨이 있기에. 체념의 순간이래도 비굴하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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