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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Oct 10. 2023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교정과 교열

 20대 중후반에 입사한 첫 직장은 영상 번역 회사였다. 주로 외국의 드라마나 영화, 다큐멘터리 등의 영상물을 번역해서 한국어 자막을 만들거나 더빙하는 일을 했다. 마음을 트고 지내던 한 살 터울의 동생, 윤이가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오빠, 우리 회사 오세요. 꽃길만 걷게 해 줄게요. 한참만에 만난 윤이가 승진했다며 신이 나서 말했다. 됐네요. 네 부르튼 입술을 좀 봐. 꽃길에서 구르기라도 했니. 요즘 좀 바빠서 그래요. 회사 들어오면 미드랑 영화를 월급 받으면서 볼 수 있어요.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는 신의 직장이나 다름없었다. 부서를 개편하며 인력을 충원한다고 했다. 윤이는 문예창작을 전공했는데, 내 문학적 잠재력에 주목해 주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우리 과에 오빠보다 글 못 쓰는 사람 수두룩해요. 윤이는 가끔 소설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천명관의 '고래' 같은 책을 받아 읽고서 처음으로 읽는 사람을 넘어 쓰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그려보기도 했다. 면접을 보고 일주일 후 출근을 했다. 속한 부서는 번역사업부였다. 주 업무는 프리랜서 번역 작가에게 영상과 대본을 넘기고 교육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작가의 번역물을 교정, 교열해서 편집실에 넘기는 작업을 했다. 회사에서 개발한 편집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히고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아기 다리 고기 다리던 방학. 나름 문학소년이란 자긍심이 있었는데 검증해 보니 내 국어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개발과 계발을 구분하지 못했다. 밥 '한번' 먹자와 줄넘기를 '한 번' 했다의 띄어쓰기가 달랐다. ~로서와 ~로써는 항상 헷갈렸다. 세종대왕님이 한글날 무덤에서 일어나 뺨따귀를 때리고 가방에 나를 구겨 넣을 지경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더니 처참한 수준의 문장력으로 언어의 가치를 잘도 유린하며 살았다. 뻔뻔하게. 교정은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수정하는 것이었고 교열은 오류가 있는 내용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윤문은 어색한 문장, 장황한 문장을 자연스럽고 명료하게 바꾸는 것이었다. 윤문, 글을 윤이 나게 다듬다. 내가 가진 직업이 제법 근사하게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보니 기대처럼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듯 영상물 자체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다소 지루하면서도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작가마다 역량이 다 달랐다.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문장을 응축해야 하는데, 영어의 말 길이보다 길게 주저리주저리 달려 있는 번역이 많았다.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장황한 말은 다 잘라내야 했다. 의역과 직역의 경계를 매끄럽게 넘나들지 못하는 문장은 처치 곤란이었다. 신입 작가의 경우 오역도 비일비재했다. 마치 번역기를 돌린 듯 매끄럽지 못한 문장, 주어와 술어가 호응이 안 되는 문장을 붙잡고 있으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번역가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보다는 국어를 잘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문장의 주인은 문장 속 주어와 술어였다. 문장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면 기준점을 내가 위치한 지점에 두게 되어 엉성한 번역이 이루어지곤 했다. 앙상하고 어설픈 문장과 씨름하느라 매일없이 야근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막차를 타고 퇴근했다. 자취방은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반지하였다. 경사가 심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걸어야 했다. 왜 이렇게밖에 살지 못할까. 왜 내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고 남이 쓴 문장을 고치고 있을까. 가끔 쓸쓸한 날엔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불이 나간 가로등이 아무도 내가 우는 것을 볼 수 없게 만들어 주었다. 꾸부정하게 삐뚤어진 내 몸짓처럼 인생도 기울어져 있다고 비관하던 밤이었다.


 오 개월쯤 지나자 문장을 요리하는 솜씨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를 내 집 드나들듯 들어간 덕분이었다. 팀장인 윤이는 번역팀 직원들에게 작업물을 배정하는 일을 했다. 그녀의 편애 덕분에 취향에 맞는 영상물을 도맡아 작업할 수 있었다. 음흉하고 능청스러운 해석이 필요한 19금 미드나 아기자기한 대사가 관건인 코믹물, 각종 애니메이션을 전담하게 되었다. 번역 작가와도 손발이 척척 맞기 시작했다. 애초에 창작이 아니라 언어만 옮기는 작업이라 좋은 번역 앞에서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주어와 술어는 그대로 두고 목적어 정도만 교열하기에 이르렀다. 오빠도 글 한번 써 보는 게 어때요. 윤이는 내게 이제 회사에 적응이 끝났으니 틈나면 소설을 써 보라고 권하였다. 소설은 아무나 쓰니. 그러는 넌 왜 안 쓰는데. 전 글렀어요. 문장이 안 돼요. 문장이! 만약 오빠가 검수하면 난도질할걸요. 순간 윤이의 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그녀에 대해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이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꽃길만 걷게 해 준다며 어딜 도망 가. 박스에 짐을 싸고 있는 윤이의 등 뒤로 말을 던졌다. 미안해요. 제 인생도 교정을 좀 해야 될 것 같아요. 오빠는 나중에 꼭 글 쓰세요. 윤이는 자기 책상에 있던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란 소설집을 선물로 주고 떠났다. 소설의 제목은 셰익스피어 이후의 최고의 극작가라 불리는 조지 버나드쇼의 묘비명에서 가져왔다. 묘비명의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었다. 그것을 누군가 "우물쭈물 살다 내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로 번역한 것인데 대표적인 오역이었다. 다양한 번역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정말 오래 살다(나이 들면) 보면 이런 일(죽음) 생길 줄 알았지." 정도가 무난했다. 이렇게 오래 살았으니 죽는 게 당연하지. 죽음 뭐 별 거 있냐라는 의미로 자신의 죽음마저 풍자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오역이 없었다면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처럼 멋진 문장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우물쭈물, 우왕좌왕, 갈팡질팡. 내 인생을 가장 정확하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단어는 없었다. 그 불완전하고 불안한 단어가 부끄러우면서도 내 몸에 딱 맞은 옷처럼 익숙했다. 작가의 오역을 찾아내면 윤이는 이건 번역이 아니라 반역이에요,라고 말했다. 제 문장은 부사랑 형용사만 너저분하지 담백하지가 못해요. 마치 제 삶처럼요. 윤이가 했던 말이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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