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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Feb 02. 2024

서리태 수확

껍데기는 가라

11월의 어느날, 노동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춤사위로 승화시키는 아내와 우리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농사짓는 집으로 장가를 들었다. 아빠는 공무원이었고 엄마는 장사를 했다. 이전에는 논일과 밭일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귀하게 자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부모님이 농업에 종사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할아버지 댁에서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농사를 짓다가 땅을 처분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사촌형들은 논에 줄을 대고 모를 심곤 했다. 아직 어리던 동생과 나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열외였다. 농경 사회에서 자식, 특히 아들은 일손이자 노동력의 자산으로 여겨져 왔다. 농번기가 찾아와도 농사일에 동원되지 않는 것은 시골에서는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물론 한 마지기의 농사처도 없는 것이 더 빈 깡통이라는 것을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됐지만. 시골에서 자란 나는 농번기에 농작에 억지로 끌려가는 친구들을 지켜봐 왔다. 자식 된 도리로 당연한 일이었지만 철없던 사춘기 소년들에겐 그것마저도 고역이었다. 못자리판을 만들고 모를 심는 4월 중순에서 5월이 되면 친구들은 붉게 그을린 얼굴로 학교에 나타났다. 집에서 농사일을 돕던 녀석들은 그때부터 이미 다부진 몸과 옹골찬 근육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들의 고달픈 노동을 지금에 와서는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고된 노역에 투입된 놈들치고 철이 안 든 녀석이 없었다. 이른 나이에 자기희생과 가족애, 인내, 노동의 가치 따위를 몸소 체험한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의 면면을 반추해 보면 시장터에 살던 녀석들은 대체로 영악하고 속된 때가 빨리 탔다. 반면 더 깊은 시골에서 농사를 돕던 아이들은 순박하고 우직한 면이 있었다. 나는 부자도 아니면서 부잣집 아들내미처럼 하얀 피부를 가졌고, 매사에 뺀질거렸다. 일찍이 괴로움을 감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쉽게 포기하고 회피하곤 했다.


 처갓집에서도 농사가 주업은 아니었다. 두 분 다 직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논과 밭을 부지런히 경작하고 계셨다. 퇴근하시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밭으로 나가 작물을 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았다. 휴일에도 늦잠 한 번 자지 않고 논과 밭의 농작물을 자식처럼 정성껏 돌봤다. 하루아침에 그런 끈덕진 근면과 성실이 몸에 배진 않았을 것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날을 나태와 싸워가며 몸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겠지. 그렇게 만들어진 습관은 탄탄한 삶의 기초가 되어 어지간한 풍랑에는 요동도 하지 않았다. 땀흘려 수확한 곡식은 주로 자식을 먹이거나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는 데 쓰였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벼 모판을 만드는 날과 모내기를 하는 날, 단 이틀을 제외하고는 내게 일을 도와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당신들이 조금 더 일할망정 자식들의 수고를 원하지 않는 배려심 때문이었다. 허리가 부실한 사위를 위한 속 깊은 양해가 깔려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내는 내게 눈치를 주며 가끔씩 도와드리자고 했다. 그녀는 결혼하면서부터 갑자기 효녀가 되었다. 자주는 아니고 이따금씩 처가의 일을 도왔다. 첫사랑, 첫 여행, 첫 월급. 모든 처음이 주는 설렘과 신선함이 농사일에도 적용됐다. 처음으로 배추나 옥수수를 심고, 호박과 가지를 따고, 고구마 순을 걷었다. 난생처음 콩을 심고 베고 털었다. 생강과 땅콩의 잎이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 알았다. 고추를 딸 때 태양이 얼마나 뜨거운지, 고구마를 캘 때 허리가 얼마나 아픈지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쌀을 비롯해서 처가에서 얻어 온 작물로 일 년 내내 생활이 가능했는데, 그중 백미는 들기름과 서리태콩이었다. 직접 거두어들인 참깨와 들깨를 짜 만든 참기름과 들기름을 큰 유리병에 담아 보내주시면 밥에 간장과 계란을 넣고 비벼 먹었다. 웬만한 한식 요리에 참기름과 들기름은 무난하게 잘 어울렸다. 일단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하면 없던 식욕도 마구 솟구쳤다. 아내는 콩밥을 좋아해서 처가에서 얻어온 서리태를 넣고 일 년 내내 밥을 지어먹었다. 여름에 처가에 가면 서리태를 갈아 소면을 넣고 차가운 콩국수를 만들어주셨는데 맛이 일품이었다. 소박하면서도 순수한 맛이 담겨 있는 온갖 곡식을 대하며 내게도 그것들을 취할 자격이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몸 노동의 수고 속에 담긴 고귀한 가치도 모른 채 멀쩡한 척 시치미를 떼고 살아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금요일 저녁 처가에서 호출이 왔다. 주말에 서리태 콩 수확을 해야 되니 아침에 와서 도우라는 것이었다. 밭에 도착하니 이미 농익은 콩 열매는 줄기 채 잘려 여러 뭉텅이를 이루고 있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탈곡기를 돌리고 있었다. 밭에 펼쳐진 콩 뭉치를 수레에 담아 탈곡기까지 운반하는 게 아내와 나의 역할이었다. 고구마를 캐는 작업에 비하면 껌이나 다름없었다. 하찮은 손길이었지만 장모님은 너희들이 도와줘서 일이 금방 끝날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어 주셨다. 아내와 나는 밭과 둑에 넓게 펼쳐진 콩을 수거해 날랐다. 어찌된 일인지 호흡도 잘 맞아 지루하지 않았다. 탈곡기는 굉음과 먼지를 만들며 부지런히 알맹이와 껍데기를 분리해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엉뚱하게도 시의 한 구절이 갑자기 떠올라 시가 담고 있는 함의도 제대로 모른 채 계속해서 껍데기는 가라, 만 반복해서 읊조렸다. 어느 시대든지 껍데기와 알맹이는 상존하고 있었다. 민족의 현실이란 거대한 영역이 아니더라도 모든 개인의 세계에 해당하는 담론이었다. 내게 거두어야 할 것과 버려야 것에는 무엇이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껍데기는 가라. 내 안에 허위와 가식은 사라지고 알맹이만, 순수만 남거라. 아내는 고된 노역 때문에 정신이 약간 흐트러졌는지, 아니면 일하기가 싫어 농땡이를 부리고 싶어서인지 우리와 함께 춤을 추었다. 장모님이 만들어 주실 담백한 서리태 콩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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