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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Mar 19. 2024

낙지는 힘이 세다

마음의 지점

 엄마의 호출이 있어서 본가에 갔다. 식탁 위 스티로폼 박스 안에 크고 작은 낙지 여러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애 가지려면 잘 먹어야 된다. 엄마는 억척스럽게 낙지를 떼어 비닐에 담아 주셨다. 박스의 벽면에 무시무시한 빨판을 흡착시키고 버티는 바람에 떼어 내느라 애를 먹었다. 먹이를 움켜쥐는 데 사용하던 빨판으로 살아남기 위해 매달리는 모습을 보니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안 먹을 것도 아니면서. 너도 애쓰는구나.

 낙지는 스테미너의 상징과도 같은 식재료였다. 쓰러진 소의 입을 벌리고 큼직한 낙지를 넣어 주면 우걱우걱 삼키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낙지는 타우린과 무기질, 아미노산이 듬뿍 들어 있어 칼슘의 흡수와 분해를 도왔다. 보양 음식으로 각광받는 이유는 빨판으로 무언가를 당기고 끈덕지게 붙어 있는 이미지가 강력한 힘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트에 들러 고추, 콩나물, 미나리와 양파를 샀다. 각종 야채를 넣고 매콤한 낙지볶음을 할 생각이었다. 애호박 하나에 삼천 원이 넘어서 손만 후덜덜 떨다가 내려놓았다. 비닐 안에서 꿈틀꿈틀하는 낙지를 보자 고양이들이 관심을 갖고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미안해, 이건 엄마 거야. 굵은소금으로 낙지를 훑어 씻어낸 다음에 뜨거운 팬에 살짝만 데쳤다. 고춧가루와 대파, 다진 마늘을 기름에 달달 볶았다. 알싸한 불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입에 침이 고였다. 그런 다음 양념장을 만들어 넣고 야채를 볶다가 낙지를 투입하였다. 낙지를 오래 볶지 말아야 입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식감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고추장 없이 볶음에 물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게 레시피의 핵심이었다. 늦게 퇴근한 아내가 한 점 먹더니 엄치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따뜻한 밥에 데친 콩나물과 낙지볶음을 넣고 비벼 먹었다. 기력이 회복됐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매운 양념 때문에 뜨거운 기운이 충만한 것은 확실했다. 고마워, 낙지야.

 티브이에서 맨손으로 낙지잡이를 하던 아저씨를 본 적이 있다. 낙지는 개펄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도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지상으로 물이 뽀얗게 솟아오르며 흔적을 남겼다. 그 숨구멍 주위에는 구멍 여러 개가 연결되어 있는데,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다른 구멍으로 숨기 때문에 신중해야만 했다. 조금씩 입구를 넓힌 아저씨가 재빠르게 손을 어깨까지 밀어 넣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낙지는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꼼짝없이 망태기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저는 낙지가 가는 길이 다 보여요. 비법을 묻는 리포터의 질문에 아저씨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개미굴처럼 지하에 펼쳐진 여러 개의 방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낙지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부서 회식이 있었다. 장소는 명가낙지마당이란 곳이었다. 어, 어제도 낙지 먹었는데. 이틀 연속으로 낙지의 보드라운 다리를 가위질해야 하다니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갑자기 속에서 죄책감이 낙지의 다리처럼 꿈틀거렸다. 그렇다고 안 먹을 것도 아니면서. 낙지와 함께 배추와 청경채, 미나리 등을 넣고 끓인 연포탕을 먹었다. 직원들은 진하고 맑은 국물이 술을 부른다며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쌓여 가는 빈병의 개수를 보아하니 술판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술기운에 허리 위까지 흠뻑 젖은 직원들은 새우튀김과 낙지볶음까지 시키고 맛깔스럽게 술을 마셨다. 붉은 옷을 입은 낙지야, 오늘도 만나는구나. 이틀 연속 먹는데도 불구하고 맛이 기가 막혔다. 술기운이 거나해지자 지난달에 부서 이동을 최 대리가 전임자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인계인수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을뿐더러 회계 처리를 엉망으로 하고 간 탓에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같이 맞장구치면서 동의해 주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신세한탄과 전임자에 대한 평가는 실체적 진실에 가까웠다. 그런데 급기야 퇴물 운운하며 사람을 조롱하는 악랄한 말이 쏟아지자 더이상 동조할 수 없었다. 최 대리가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모하여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억울한 맘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사람들 많은 데서 누군가를 너무 공격하지는 마. 내가 뱉은 말은 부메랑처럼 언젠가는 나한테로 돌아오기 마련이잖아. 옆에 있던 고참 선배가 최 대리의 앞에 새우튀김을 하나 놓으며 간결한 조언을 남겼다.

 집에 돌아오니 다옹이가 아옹이를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있었다. 박스 안으로 피신하면 공격을 멈추던 불문율을 깨고 아옹이의 뒷목을 깨물고 말았다. 비록 놀이에 불과한 작고 허다한 몸싸움이었지만 왜 내 편애의 저울이 강자인 다옹이보다 약자인 아옹이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을 포함한 상위 포식자 앞에 놓인 낙지를 대할 때는 분명히 가련하고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숨어 있다가 작은 생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교활할 수가 없었다. 문어과의 연체동물은 치유와 지혜를 상징하는 동시에 기만과 부정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우리는 마음의 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강자도 될 수 있었고 약자도 될 수 있었다. 

 낙지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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