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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Mar 11. 2024

핑퐁

부시맨의 콜라병

 

 지옥 같았던 주산 학원을 피해 가장 먼저 도피하고자 했던 곳은 태권도장이었다. 바야흐로 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태권도는 남자의 로망이었다. 같은 반 친구인 짠지는 2학년 때부터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 앞으로 노란 학원차가 녀석을 태우러 왔는데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난 태권도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딸 거야. 짠지는 틈만 나면 앞차기와 옆차기 시범을 보이는가 하면 교실의 마루 바닥에 사타구니를 문대가며 가랑이가 얼마나 잘 찢어지는지 몸소 보여주곤 했다. 녀석은 심성이 여리고 겁이 많아서 주둥이로 싸울 때만 검은 띠였고 비상시에는 늘 흰 띠였다. 사범님이 그러는데 운동 배운 사람은 어디 가서 함부로 힘자랑하고 다니면 안 된대. 잘못하면 사람 크게 다친대. 그런 사려 깊은 이유로 짠지는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고, 주로 분을 삭이는 게 주특기였다. 엄마, 나 주산 끊고 태권도 다니면 안 될까? 태권도장이 왜 다니고 싶은데? 내 간곡한 청에서 심상찮은 절박함을 느꼈는지 엄마가 되물었다. 태권도장에 가면 정기적으로 겨루기라는 걸 하는데, 거기서 꼭 패줘야 될 친구가 있어서 그래. 엄마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두 번째로 희망한 곳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였던 컴퓨터 학원이었다. 가정에도 흑백 모니터의 286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됐다. 컴퓨터를 배운다는 건 순전히 핑계였고 속셈은 따로 있었다. 학원에서는 도스나 베이직을 주로 배웠는데, 실상은 타자 연습이나 좀 하다가 몰래 게임을 하는 게 일과였다. 가정용 PC는 부잣집 아니면 엄두도 못 낼 만큼 고가였다. 동네에서 최초로 컴퓨터를 들여놓은 신식 가정은 부시의 집이었다. 부시맨이란 영화는 아프리카 사막의 부시맨족 마을로 비행기 조종사가 버린 빈 콜라병이 떨어지면서 시작된다. 하늘에서 떨어진, 난생처음 보는 콜라병을 부시맨들이 신의 물건이라고 받아들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물론 부시의 집이 신이 내린 축복, 문명의 이기를 상징하는 개인용 컴퓨터를 빠르게 도입하였기 때문에 부시란 별명이 붙은 건 아니었다. 단순히 부시의 얼굴이 한국 사람치곤 과하게 새까맣기 때문에, 짧은 머리 스타일이 영화의 주인공과 닮았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었다. 학교 수업 파하고 부시의 집에 가면 8비트 도스 게임인 고인돌, 남북전쟁, 페르시아의 왕자 등을 능숙하게 하는 부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컴퓨터 앞에서 진지하게 열중하는 부시를 보고 누가 그를 열등생이라고 손가락질하겠는가. 게임에 얼마나 빠져들었는지 짠지는 그 좋아하는 태권도 학원도 빼먹고 부시의 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부시는 자기가 세 판 정도 하고 나서 짠지와 내게 한 번씩 게임을 하게 해주었다. 부시와 다르게 능숙하지 못한 우리는 오래가지 못하고 부시의 플레이만을 감상할 뿐이었다. 꿈에서도 키보드를 두들기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부시에게 느닷없이 오백 원짜리 동전 크기의 원형 탈모가 발병했는데 그 원인이 과도한 컴퓨터 이용이라는 것이었다. 엄한 부시의 아버지는 머리털이 다시 날 때까지 게임 금지령을 내렸다. 짠지와 나는 수시로 부시의 탈모 상태를 진료, 진단했으나 호전은 더디기만 했다. 짠지는 서리태콩이 탈모에 좋다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듣고는 자기 도시락에 있는 콩을 부시에게 몰아주었다. 꼭꼭 씹어 먹고 얼른 나으렴. 우리는 부시맨이 콜라병을 애지중지하듯 부시의 머리에 손을 얹고 쾌유를 위해 기도했다.


 아지트인 부시의 방이 봉쇄되자 삼총사는 다른 놀이를 찾아야만 했다. 전자기기가 흘리는 전파를 피해 산과 들로 나돌다가 찾은 또 다른 유희는 바로 탁구였다. 마을에 있던 성당의 문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었다. 성당의 부속 건물 한 모퉁이에 탁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나 와서 자유롭게 즐기란 듯 친절하게 탁구채와 탁구공도 비치되어 있었다. 당돌한 부시맨과 아이들은 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매일없이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던 탓에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탁구를 이해하고 익혔다. 경기의 승자는 게임을 계속할 수 있고 패자는 순번대로 돌아가며 승자에게 도전하는 방식이었다. 왼쪽으로 줄 것처럼 하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공을 보내는 것. 세게 치는 척하다 네트 앞에 공을 살짝 떨어뜨리는 일. 적이 모르게 공에 스핀을 먹여서 리시브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위. 나는 모든 스포츠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 중 하나가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탁구는 매력적인 스포츠였다. 공을 칠 때 라켓의 각도와 손목의 힘 따위로 인해 저마다 다른 회전이 발생하고 공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순간의 선택과 미묘하게 발생한 변수로 인해 매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과 다를 바 없었다. 상대방 기술의 정수가 닮긴 공은 마치 생이 내준 숙제처럼 내게 넘어왔다. 나의 턴이 되면 상황에 따라 공격을 할지 수비로 응수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포인트를 잃었고 상대를 제압할 만한 멋진 공격이 들어갈 경우 점수를 획득했다. 핑, 퐁, 핑, 퐁. 우리는 생과의 타구를 주고받듯이 공격과 수비를 교환하며 기분 좋은 랠리를 계속 이어나갔다.

 

 너희들 누구 허락 맡고 탁구 치니? 부시가 넘긴 탁구공이 네트를 넘어 내 쪽 탁구대 위로 때구루루 굴러왔다. 우렁우렁 울리는 굵직한 음성에 뭔가 대단한 잘못을 한 것처럼 순간 몸이 굳었다. 성모마리아에게 허락받았는데요!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의 등장에 당황해서 뭐라고 할 말을 찾는데 심판을 보던 짠지가 맹랑하게 드립을 날렸다. 천주교 신자니? 아니요, 얘는 절에 다니고 우리는 교회 다녀요.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니까요. 쓸데없이 정직한 짠지가 아무 말 대잔치를 이어갔다. 나랑도 경기해볼래? 아저씨도 탁구 칠 줄 알아요? 다음에 제 차례고 그다음이 아저씨 차례예요. 덩치 아저씨는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초고수였다. 아저씨는 백핸드도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우리와는 다른 스핀 기술을 사용했다. 그 기술의 이름이 드라이브라는 것을, 아저씨의 정체는 신부님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됐다. 실력은 패기만 못하네. 연습 좀 해야겠다. 연달아 셋을 꺾은 아저씨는 시시하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저씨에게 일격을 당한 우리들은 한동안 망연자실하였다. 공동의 적이 생긴 그 순간부터 우리의 관계는 라이벌에서 동지로 바뀌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매일 성당으로 달렸다. 부시는 짠지와 내게 백서브를 넣는 법을 알려 주었다. 나는 스매싱을 할 때 상대의 오른쪽을 보며 왼쪽으로 내리꽂는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짠지는 우리에게 상대를 약 올려서 멘탈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수업 중 칠판의 중간에 가상의 네트를 만들고 탁구를 치는 상상을 했다. 꿈결에서도 탁구를 쳤다. 꿈에서 한 번도 신부님을 이기지 못했다.


 셋 다 자기가 탁구를 제일 잘 친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일단 꼴찌는 짠지가 확실했다. 얄팍한 심리전도 이제는 밑천이 다 드러나서 통하지 않았다. 부시는 서브와 수비에 강했으나 공격력은 나보다 아래였다. 끈적한 수비를 통해 상대를 실수를 유발하는 게 부시의 주특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의 공을 잘 받아낸다 한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결정타를 날릴 필살기가 없으면 승리하기 힘들었다. 최고의 공격이 최상의 수비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수비는 약했지만 강력한 스매싱 한 방을 보유하고 있었다. 부시에게 강서브를 넣는 법을 배우면서 승률이 제일 높아질 무렵, 덩치 아저씨, 아니 신부님이 등장했다.

 선봉장은 짠지였다. 지난번 근본 없는 성모마리아 드립에 이어 드라큘라를 잡아야 하니 성수를 좀 달라고 했다. 신부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시는 자기가 끈질긴 수비로 진을 빼놓겠다며 2번 타자로 나섰다. 하지만 신부님의 가공할 만한 드라이브는 부시의 수비력으로도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주자로 나선 나 역시 신부님의 노련한 경기 운영과 실력 앞에 한 점도 점수를 내지 못했다. 경기 막바지에 백서브를 넣고 공이 조금이라도 뜨면 무조건 맹공을 퍼붓는 전략으로 나섰다. 한 점이라도 제대로 내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스핀이 심한 백서브에 예상대로 신부님의 리시브는 어중간했고 회심의 스매싱이 상대 진형의 왼쪽 구석으로 절묘하게 꽂혔다. 이건 먹혔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구의 신부님은 예상했다는 듯 왼쪽으로 재빠르게 이동해서 드라이브를 걸어 내게 공을 넘겼다. 나는 드라이브라는 기술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신부님의 동작을 보고 무작정 따라 했다. 회피해서는 답이 없고 맞공격으로 대응해야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갑작스러운 맞드라이브에 당황한 신부님은 처음으로 여유를 잃고 허둥지둥 라켓을 휘둘렀다. 신부님이 친 공은 내 쪽을 향하지 못하고 그만 심판을 보던 부시의 머리를 강타했다. 우리는 다 같이 괴성을 내지르며 환호했다. 15대 1로 졌지만 어쩐지 이긴 것 같았다. 신부님이 부시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괜찮냐고 물었다. 부시의 머리에 오백 원짜리 땜통은 진작에 사라졌지만 우리는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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