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는 정말 자유로운가, 아니면 환상에 속고 있는가
게임은 항상 우리에게 선택의 환상을 준다. 화면에 나타나는 두 갈래의 길, 대화창에 뜨는 여러 개의 선택지, 다른 결과를 암시하는 분기점들. 이 모든 것은 유저가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라는 감각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정말 실존적일까? 우리는 게임 속에서 진짜 선택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스템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 제한된 결정을 하는 것일 뿐일까?
실존주의는 여기서 “진정한 자유”와 “허구의 자유”를 명확히 구분한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말했지만, 그 자유는 단순한 선택지의 다수가 아니라, 그 선택의 의미와 책임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가리킨다.
게임의 분기 시스템은 보통 이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스템이 미리 준비한 경로를 유저가 선택하는 것일 뿐, 진정한 결단의 순간은 아니다.
예를 들어,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는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지만, 그 선택이 궁극적으로 모든 결과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 캐릭터의 죽음이나 사건의 전환점은 달라질 수 있지만, 결국 유저는 프레임 안에서 제한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시스템적 자유일 뿐, 실존적 자유는 아니다. 실존적 자유는 단지 결과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게임은 복잡한 분기와 수많은 엔딩을 준비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개발자가 설계한 범위 내에 있다.
“진정한 자유”는 시스템 바깥의 선택이지만, 게임은 그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가능성을 실험해볼 수 있다”는 감각은 유저에게 일종의 환각을 준다. 그러나 그 모든 분기는 이미 설정된 루트일 뿐이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수많은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모든 분기는 결국 하나의 큰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유저는 수십 개의 엔딩을 볼 수 있지만, 그 모든 갈래는 결국 프레임 안의 자유에 불과하다. 이때 유저는 마치 스스로 세계를 구성하는 창조자인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시스템이 제안한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를 고를 뿐이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선택지의 환상이다.
많은 유저는 게임의 ‘선택지 개수’가 많을수록 더 자유로운 경험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자유란 단지 선택지의 양이 아니라, 그 선택의 의미와 책임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선택지가 많아도 그 선택이 진정한 자기 결단이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시스템이 설계한 환상적 자유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인터랙티브 무비장르의 게임은 수백 개의 선택지와 분기점, 그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결말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은 이미 설계된 시나리오 안에서 움직인다. 유저가 아무리 다양한 결정을 내린다 해도, 그는 여전히 설정된 서사 구조 내에서 행동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의 선택은 시스템이 허용한 범위를 넘어설 수 없으며, 그 범위 바깥의 결과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상황 속의 자유”와 같다. 우리는 항상 특정한 조건 안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 그 조건은 우리를 제한하지만, 그 안에서라도 의미를 발견하고 책임을 지는 순간, 비로소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
즉, 선택의 다양성 자체가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자유는 선택의 결과를 자각하고, 그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는 데서 비로소 발생한다.
게임에서의 선택이 무의미하게 반복될 때, 유저는 점차 “선택의 피로”를 느끼게 된다. 이는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의미를 잃는 순간 느끼는 실존적 허무다. 게임은 때로 의도적으로 이런 허무감을 조장하기도 한다.
《Papers, Please》는 이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유저는 수백 명의 입국 신청자를 심사하면서, 자신의 결정이 누군가의 생사를 좌우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반복되는 선택은 점점 무의미하게 변한다.
처음에는 도덕적 딜레마를 고민하던 유저도, 점점 단순한 기계적 판단으로 바뀌어간다. “이 사람을 통과시켜야 할까?”는 점차 “몇 점을 더 벌어야 할까?”로 전락한다. 이 순간, 선택은 단지 점수와 자원의 최적화를 위한 기능적 행위로 변모하고, 유저는 실존적 주체가 아니라 시스템의 일부로 흡수된다.
이것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비극적 자유”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음에도, 그 선택이 점차 의미를 잃어가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할 위험을 맞이한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바로 이 순간,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주장한다. 의미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 의미를 다시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임은 선택을 던지고, 유저는 그 선택을 통해 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나 그 선택이 단지 시스템이 설계한 환상일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 진짜 자유는 시스템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을 의심하고, 넘어서는 순간에 비로소 발생한다.
자유는 단지 선택지의 다수가 아니라, 그 선택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용기다. 게임은 이를 가끔 잊어버리지만, 실존적 주체는 언제나 그것을 자각하고, 그 자각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