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의 생철학과 시간 감수성에 관한 고찰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또한 인간에게는 가장 힘든 과제다.
이 두 명제는 오늘 내가 깊이 성찰해보고자 하는 주제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로지르는 통찰이 담겨 있다.
도심을 걷다 보면, 보증금과 임대료가 비쌀 법한 상가들이 문을 닫은 채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 외관은 화려하게 리모델링되어 있고, 개업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폐업 상태다. 머릿속으로 대략 계산해 보면, 족히 1억 원 이상이 들어갔을 듯하다. 가만히 있었다면 그만큼의 손해는 없었을 텐데, 왜 사람들은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사업을 시작하는 걸까?
물론 단순히 ‘돈이 많아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직관은 조금 다르게 반응한다. 혹시 그들은 단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움직였던 건 아닐까?
어떤 사람은 사회적으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명함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행해보고 싶은 충동을 거스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본의 제약 없이, "한 번 해보지 뭐"라는 심정으로 시작한 듯한 느낌. 실패해도 그만인 게임처럼, 혹은 진심으로 해보고 싶었던 꿈처럼.
나는 이런 상상을 소설처럼 구성해 보곤 한다.
부모가 자산가이고, 자식은 특별한 능력이나 성실함 없이 살아온 인물. 그래도 뭔가는 해야 할 것 같아 가게를 연다. 일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간간히 ‘사장 역할’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처음엔 그런 인물에게 비판적 상상을 던지곤 하지만, 곧 문득 이런 철학적 물음에 이르게 된다.
“설령 돈이 많더라도,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연예계 뉴스에서도 유사한 예시를 자주 접한다.
연예 활동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이후 사업에 실패해 빚을 지거나, 현재도 빚을 갚기 위해 활동을 재개한 인물들. 우리는 그들을 두고 “가만히 있었으면 됐을 것을 왜 그랬을까”라며 손쉽게 평가하고 조롱한다. 그러나 정말 ‘가만히 있기’가 그토록 쉬운 일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살아가는 존재다.
그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감지되고 인식되는 흐름, 즉 선험적 감수성으로서 작용한다.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늘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만’ 존재의 연속성을 느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따라서 자신이 가진 것이 자본이라면, 그 자본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충동은 자연스럽다. 계획하고, 시도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움직이려는 본능. 그것은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가 지닌 본질적 충동이다.
여기서 나는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사유를 떠올린다.
그에 따르면, 생명은 정태적 질서나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창조적 흐름이다. 생명은 언제나 ‘새로움’을 향해 도약하려는 내적 에너지, 즉 생명의 추진력을 지닌다. 인간은 그 에너지의 결을 따라 사는 존재이며, 멈추는 순간조차 마음속에서는 끊임없는 흐름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정지’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움직이고, 선택하고, 창조하려는 상태다.
그렇다면, 어떤 도전이 실패로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타인에게 "가만히 있었어야지"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물론 모든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도덕성을 잃은 편의주의적 도전, 불로소득을 추구하는 일확천금의 유혹, 윤리를 외면한 투자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실패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듯 조롱하는 태도는 부당하다.
실패는 살아 있는 존재만이 겪는 가장 솔직한 흔들림이다.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도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다.
인간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존재이며, 멈추는 순간에도 살아 있기에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이게 된다.
마치 진공 상태가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 또한 다양한 생각과 감정, 욕망과 신념으로 채워져 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며, 식물도 아니다. 움직임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그 움직임을 채울 것인가다.
우리의 에너지가 향하는 방향이 파괴가 아닌 창조, 탐욕이 아닌 선함, 허영이 아닌 진실함이 되기를 바란다.
그 선택 앞에서 우리는 늘 실수하고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니 누군가의 실패를 비난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나는 정말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살아 있는가?”
이 질문의 끝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인간이라는 존재의 위태롭고도 아름다운 본성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것이 곧, 살아 있다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