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장소의 언어적 위계에 대하여
공공장소에서 때때로 마주치는 풍경이 있다. 토종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영어 사용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방식에 있다. 강한 억양, 높은 음량, 그리고 명백한 과시의 기운. 듣고 싶지 않은 대화가 귀를 파고든다. 나는 문득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싶어진다.
자녀와의 영어 대화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실상은 단어 선택과 문장 구성에서 어색함이 묻어난다. 자녀도 알아듣지 못할 표현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무대’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하는 내용은 대개 자신의 사회적 지위, 경제적 배경, 자녀 교육 수준을 부각하는 담화로 채워진다. 사적 욕망이 공적 공간을 점유하는 셈이다.
이런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처음엔 혹시 내가 예민한 것인가 의심했다. 시기심일까? 질투일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 반응이 아니다. 이 위계적 언어 놀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윤리적, 심리적 저항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상대의 언어가 자연스러운지, 억지스러운지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리고 그런 직관은 말한다. 그것은 교양이 아니라 과시이며, 자존감이 아니라 불안과 결핍의 방어기제라고.
영어는 본래 의사소통의 도구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교류가 아닌 계급의 상징, 일상의 수단이 아닌 과시의 장치로 기능한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종종 국제적 정체성, 높은 교육 수준, 계급적 우위를 상징하는 코드로 작동해 왔다. 그 결과, 일부 사람들은 한국어보다 영어를 사용할 때 목소리가 더 커진다. 언어 위계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것이다.
물론 예외도 존재한다. 해외 장기 체류자, 국제학교 학생, 다중언어 환경에서 자란 이들의 언어 사용은 자연스럽다. 그들의 이중 언어는 삶의 일부이며, 과시와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인위적인 모방과 연출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직관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러한 과시는, 종종 내면의 결핍에서 기인한다. 영어 몇 마디로 자신의 우월감을 입증하고자 하는 그 욕망은, 실상 불안과 비교의식, 인정 욕구의 반영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허세는 열등감과 공허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일 뿐이다. 진정한 자존감은 조용하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평온한 사람. 그런 이들에게는 타인의 시선이 기준이 되지 않는다.
공공장소는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이다. 누군가의 청각을 무대로 삼아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는, 사소해 보여도 공동체의 윤리와 품격을 침해하는 일이다. 교양이란 단지 지식의 양이나 언어 능력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감각이다. 말의 능숙함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이 글로 누군가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언어를 둘러싼 위계적 감수성과 그 이면의 심리를 함께 성찰해보고 싶을 뿐이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교양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태도에서 진정한 품격은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