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한 문장은 근대 철학을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가 붙잡은 것은 바로 사고하는 주체의 존재였다.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사고하고 있다는 이 순간의 의식은 결코 속일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근대 철학의 토대는 이렇게 확고한 ‘코기토’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확신은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주체의 존재는 확실히 보장되지만, 인식의 대상인 외부 세계는 어떠한가? 의식하는 자아는 명백히 존재하지만, 그 의식이 마주하는 사물들은 확실한가? 이 질문 앞에서 철학은 주체 중심으로 기울어지고, 때로는 외부 세계를 의심하거나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진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하려는 확신이 오히려 진리의 균형을 무너뜨린 셈이다.
나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진리는 단일한 스펙트럼이 아니라 균형이다. 한쪽으로 기울면 다른 쪽이 배제된다. 지나치게 주관성만 강조하면 세계는 고립되고, 반대로 세계의 독립성만 강조하면 주체의 사유는 공허해진다. 진리란 이 두 측면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만 온전히 드러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인식의 주체와 대상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공동 운명체다. 나의 의식이 없다면 사물은 내게 의미를 드러내지 못할 것이고, 사물이 없다면 나의 의식 역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이다. 의식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에게 의존해 존재를 드러낸다.
나는 이 관계를 기독교 신학의 삼위일체에 빗대어 이해한다. 성부·성자·성령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면서도 세 위격이 긴밀히 얽혀 있다. 주체·세계·인식의 관계 역시 그렇다. 세 요소는 각기 구별되지만 동시에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얽힘을 이룬다. 이 비유는 철학적 설명을 넘어, 진리가 근본적으로 관계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시사한다.
현대 과학도 이러한 시각을 강화한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입자는 여러 가능성을 품고 있다가 관측을 통해 구체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이때 ‘관측’이 반드시 인간의 의식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가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세계는 우리와 무관하게도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세계로 현현한다.
이 지점에서 코기토의 새로운 의미가 드러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문장은 단순히 고립된 자아의 성벽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와의 더 깊은 대화를 여는 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존재를 창조하지는 않지만, 존재가 의미로 드러나도록 하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사유하고 반성하는 인간의 삶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을 넘어, 세계와 더불어 존재를 실현하는 행위가 된다.
나는 매일 이 진리를 새롭게 느낀다. 값없이 주어진 의식, 사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가. 만약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감각적 쾌락만을 좇으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존재론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으로서 실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고하고, 반성하며, 세계와 상호작용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주체와 세계가 함께 공존하며 존재하는 방식이다.
진리는 단편적이지 않다. 진리는 균형 속에서, 그리고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코기토는 고립된 주체의 고백이 아니라, 세계와 더불어 존재하라는 초대이다. 사고하는 인간은 세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세계는 사고하는 인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낸다. 이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 진정한 실존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