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신중한 선택만으로도 인생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선악의 판단처럼 고상한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원초적 지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면서도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선택을 반복한다.
나 또한 마흔 중반을 넘어가며, 순간의 쾌락보다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는 선택을 의식적으로 택하고 있다. 늦은 밤 허기를 달래는 대신 속 편한 공복을 유지하고, 공허를 달래기 위해 영상을 틀기보다 눈을 감고 쉼으로 회복하는 길을 고른다. 결국, 성공한 삶이란 무엇을 성취했느냐보다,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해왔는가로 귀결되는 듯하다.
문제는 인간이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데 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우리의 마음은 날씨처럼 변덕스럽다. 너무 예민하고 변수가 많아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긴장과 같다. 한순간 방심하면 원하는 길에서 쉽게 미끄러진다. 완성은 영속적 상태가 아니라 잠시 스쳐 가는 순간일 뿐이다. 성경은 이 점을 경고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 교만이야말로 가장 빠른 추락의 문이다.
이 물음을 과학의 언어로도 풀 수 있다. 자연은 대체로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한다. 그러나 생명은 그 흐름에 순응하지 않는다. 생명체는 열린계로서 바깥으로 에너지를 흘려보내며 내부의 질서를 갱신하고 유지한다.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법칙 안에서 더 큰 비용을 치르며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 또한 수면과 호흡, 영양과 운동이라는 평범한 행위를 통해 매일 무너지는 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되돌린다. 노력은 생명의 숙명적 대가다.
이렇게 보면, 왜 인생이 그토록 지난한가에 대한 답이 분명해진다. 우리의 육체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엔트로피의 영향 아래 놓여 있고, 우리는 의식과 의지로 그 흐름을 밀어내야 한다. 잉크 방울이 물에 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인간은 스포이드 끝에서 그 방울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긴장으로 존재한다. 팔은 저리고 손끝은 떨리지만, 그 긴장 속에서만 형태는 유지된다.
신앙의 언어로 바꾸면 더 분명하다. 죄와 회개, 온전함과 약함은 반복된다. 성화란 단번의 도착이 아니라, 넘어짐과 일어섬이 교차하는 리듬이다. 우리는 완벽에 이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회의에 머무를 이유도 없다. 오늘은 오늘의 선택을, 내일은 내일의 희망을 맡길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최소 고통의 지혜를 선택하자. 늦은 밤의 충동보다 다음 날의 맑음을, 과한 자극보다 차분한 호흡과 쉼을, 허망한 영상보다 짧은 기도와 산책을, 과식의 쾌락보다 가벼운 공복의 평안을 선택하자. 완성은 없다. 그러나 오늘의 작은 질서가 내일의 큰 질서를 낳는다.
엔트로피는 세계의 법칙이지만, 절제와 겸손, 그리고 은총은 인간에게 허락된 길이다. 넘어질까 조심하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며, 나는 살아 있는 한 이 지난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겠다. 그것이 생명을 받은 자에게 주어진 합당한 노역이자 기쁨임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