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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와 불호, 나를 이루는 뿌리

by 신아르케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철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의외로 단순한 기준 하나가 우리의 정체성을 선명히 드러낸다. 바로 호(好)와 불호(不好)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향해 설명하기 어려운 호감이나 불편함을 느낀다. 그 감정은 이성적으로 따져서 생긴 결과라기보다는, 선천적 성향일 수도 있고, 성장 과정과 경험의 흔적일 수도 있으며, 문화와 교육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를 끝까지 추적하기란 쉽지 않다. 예컨대 어떤 이는 바다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산에 끌린다. 어떤 이는 특정 음악의 리듬에 마음이 움직이고, 또 다른 이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 또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첫눈에 아내에게 이끌려 결혼에 이르렀다. 결국 이러한 선택의 근원에는 “호감”이라는 설명 불가능한 뿌리가 있었다.

이렇듯 취향은 설명하기 어려운 내적 경향성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끌리는 것들이 모여서 지금의 “나”를 형성한다. 이는 일종의 운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즐거움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호와 불호를 따라 산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더 자주 선택하고, 그에 집중하며, 그것을 삶의 일부로 축적한다. 그렇게 쌓인 경험과 지식이 곧 한 사람의 삶을 빚어내고, 존재를 만들어 간다.

그렇다면 현재의 모습은 우연히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내가 태초부터 품고 있던 성향과 취향이 발현된 모습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곧 “나”의 본질에 닿아 있는 셈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호와 불호를 어떻게 다루느냐다. 무의식적 호(好)가 나를 긍정적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연민(self-pity)이라는 함정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자비(self-compassion), 곧 자기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는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호와 불호조차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자원이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성향, 모든 취향은 결국 나만의 고유한 결로 주어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곧 자기 정체성을 존중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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