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의 부재와 정신의 게으름에 대한 철학적 성찰
우리는 왜 특정한 인간을 숭배하고, 신격화하며, 마치 신처럼 따르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문제 제기이며,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병리와 직결되는 질문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실존적 조건, 정신적 나태함이 빚어낸 우상화 현상의 근원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 수필은 신의 지혜를 구하며 실존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내면의 사유 여정을 담은 글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쾌락을 삶의 지향점으로 삼는다고 보았으며, 벤담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쾌락의 극대화와 고통의 최소화를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흔히 육체적 노동만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지만, 진정한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영역에서 비롯된다. 뇌는 우리 몸무게의 2%에 불과하지만 전체 에너지의 20~25%를 소비하는 고에너지 기관이며, 생각하는 활동 자체가 고도의 에너지를 요구하는 '정신 노동'인 것이다.
현대인은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며 살아간다. 정보의 과잉은 인지 과부화를 일으키고, 선택은 고통이 되며, 우리는 종종 그 고통을 회피한다. 메뉴 하나를 고르는 일조차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선택이 곧 책임과 포기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부담을 타인에게 전가하며 삶의 주체가 되기를 피한다. 이러한 정신적 태만은 결국 외부 권위에 대한 의존으로 이어지고 특정 인물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추종, 즉 우상화의 밑거름이 된다.
샤르트르는 인간을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했다. 우리는 즉자존재, 대타존재, 대자존재로 구성된다. 즉자존재는 주어진 조건들, 대타존재는 타인의 시선이고, 대자존재는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다. 한국 사회는 특히 대타존재에 매몰되어 있다. 외모, 학력, 지위 같은 외적 기준이 자아의 핵심을 대체하며, 진정한 자기 자신은 외면된다.
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대자존재다. 우리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선택과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형성해가는 존재다. 초승달이 보름달로 자라나듯 이상적인 자아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실존적 삶은 고통스럽지만 오직 그 길에서만 우리는 자유와 책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기도, 글쓰기, 명상 등은 이러한 사유의 통로이며 능동적이고 반복적인 정신 훈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그 형상은 육체가 아닌, 자유, 이성, 감정, 도덕 판단 같은 정신적 능력을 의미한다. 칸트의 말처럼 이는 선험적 인식의 틀이며 인간은 그 구조를 통해 세상과 자아를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다. 이 능력은 모두에게 주어졌으며 훈련을 통해 깨어나야 한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남이 대신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유 훈련은 고요한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누구에게나 가능한 방식이어야 하며, 등산길, 설거지 시간, 고요한 거실 등 어떤 장소도 사유의 성소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이 능동적인 성찰의 시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곧 기도의 시간이자, 명상의 시간이며 실존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스스로의 기질과 환경에 맞는 방식을 선택하되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실하게 실천해야만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훈련을 회피하며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의탁한다. 그 결과 우리는 연예인, 정치인, 종교 지도자 등 특정 인물을 신격화하고 그들에게 판단과 책임을 전가한다. 이는 신앙적 차원에서도 위험한 행위다. 기독교는 우상 숭배를 금하며 인간이 신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을 엄히 경계한다. 그러나 대중은 스스로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고 누군가 대신 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을 신으로 만든다.
이러한 우상화는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기대를 짊어진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연기해야 하며 기대한 사람은 환상에서 깨어날 때 깊은 실망을 경험한다. 이는 인지부조화와 자기기만 사회적 불균형을 초래한다. 그리고 이 왜곡된 삶의 방식이 사회 전반에 퍼지면 공동체는 병들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실존의 삶을 결단해야 한다. 실존은 편안하지 않지만 가장 인간다운 삶이다. 그것은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결단이다. 신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만 우리는 자유롭고 충만한 존재가 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가능한 많은 이들이 잠든 이성을 깨우고 실존의 여정을 시작하길 소망한다.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사명을 발견하고 신이 주신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