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서 조절이 어려운 사람들을 자주 관찰해 왔다.
그들은 대체로 감정이 차분하지 못하다.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상황에 대한 왜곡된 인식, 굳어진 관념,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이 겹겹이 쌓여 마음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그 결과, 몸과 마음의 항상성은 흔들리고, 그 불편함은 고통으로 전이된다.
이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은 방어한다. 그 방어는 의식적인 선택이라기보다, 몸과 마음이 자동으로 작동시키는 생존 반응에 가깝다. 목소리가 과하게 커지거나, 욕설이 튀어나오거나, 위협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쓸데없이 몸을 크게 쓰는 행동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그 목적은 분명하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
“나는 여기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행동은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관계는 어그러진다. 나는 이 행동 체계를 보며 종종 안쓰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악의라기보다, 고통이 만들어낸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사람들의 내면에는 낮은 자존감, 피해의식,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상처들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실, 과도한 제스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평온하게 말해도, 차분하게 존재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감정과 생각이 발작처럼 불쑥불쑥 치솟고, 낯선 환경이나 새로운 사람을 마주할수록 불안은 증폭된다. 방어 기제는 더 거칠게 반응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그 불완전한 정서에 감염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의 감정은 생각보다 쉽게 전염된다. 그래서 나는 본능적으로 거리를 둔다. 문제는 피할 수 없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야 할 때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호흡을 먼저 가다듬고, 마음의 중심을 붙드는 것. 상대를 정죄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연민과 자비의 시선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그 사람이 나에게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그는 같은 방식으로 정서를 드러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왜 하필 나에게 이러는가”라는 질문은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민이 곧 무제한적 허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기준은 있다. 그 기준을 넘어서는 순간에는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분명히 말해야 한다. 경계 없는 친절은 사랑이 아니라 방임이다. 사랑은 언제나 질서를 전제로 한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정작 본인 자신이 자신의 존재 방식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유발하는지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대에게 불쾌를 주는 방식으로는 호감도, 신뢰도, 사랑도 얻기 어렵다. 그렇게 고립이 깊어질수록 경계심과 공격성은 더 강화되고, 악순환은 반복된다.
그 사람이 치유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결국 사랑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 호의가 아니다. 상대가 타인과도 안전하고 평온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다른 방식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불친절한 사람은 대개 친절을 베풀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내면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누군가는 그 사람에게 처음으로 다른 세계를 보여줄 수도 있다. 다정함 앞에서 당황하고, 경계하다가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를 결국은 포기하지 못한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정서의 불완전함을 잠시 견뎌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 파괴적 희생이 아니라, 선택된 사랑의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을. 연민은 품되,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도달한 가장 현실적이고도 인간적인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