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는 예절 속에 피어난다

by 신아르케

나는 자유와 독립성을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진정으로 실존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목적 있는 선택을 통해 개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개념을 빌리자면, ‘대자존재’로서의 자각이 그것이다.

하지만 나의 자유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우리는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이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대, 장소, 부모, 성별, 외모, 사회적 배경이 이미 정해진 채로 삶은 시작되었다. 나의 자유는 무한하지 않으며, 주어진 조건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상대적 자유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진정한 자유는 ‘해석하고 선택할 자유’다. 같은 현실 속에서도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를 결정할 수 있다. 여기에 실존의 무게가 놓여 있다.

나를 형성하는 정체성 역시 복합적이다. 나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성장한 한 명의 동시대인이며,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 또한 내 인식의 틀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력한 영향은 타인의 ‘시선’이다. 타인은 나를 외모, 나이, 직업, 계급 등 외적 조건만으로 판단하고 해석하며, 그 해석은 때로 나를 고정된 존재, 즉 ‘즉자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타인의 시선 속에만 갇힐 수는 없다. 나는 매일 나 자신을 성찰하며, 타인의 평가로부터 독립된 ‘대자존재’로서의 나를 세우고자 노력한다. 실존적 삶이란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되, 그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는 섬세한 균형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본다. 그렇다면, 나만의 자유를 추구하며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존재의 방식일까? 젊은 세대 일부가 주장하듯, 타인의 간섭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타인의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라 ‘방종’ 일뿐이다.

이때 도덕적 황금률이 유효해진다. 그것은 “네가 대접받고 싶은 방식대로 타인을 대하라”라고 말한다. 내가 싫어하는 방식은 타인도 싫어할 가능성이 크다. 예절은 바로 이 공감적 윤리에서 출발한다.

레비나스는 철학의 출발점을 존재가 아니라 윤리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신 앞이 아니라 ‘타자’ 앞에서 윤리적 존재가 된다고 했다. 그의 주장처럼, 우리가 진정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시작된 성찰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결론 내린다.
진정한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 자유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장치가 바로 ‘예절’이다.
예절은 단지 형식이 아니라, 나와 타인을 공존시키는 윤리적 기술이며,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실천 전략이다.

나는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그들을 기쁘게 하려 애쓰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상대가 불쾌해할 말을 삼가고, 불편해할 행동을 피하려 노력하는 삶은 내가 지향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