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하며 주위를 보니 어느덧 단풍이 물드는 것이 보이더군요. 오전에도 더워서 반팔에 반바지를 입던 게 어제 같은데 날씨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날씨처럼 저 또한 많이 변했죠.
개인적으로 가장 고무적이었던 것은 전에는 꽉 끼었던 옷이 헐렁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옷뿐만이 아닙니다. 간식을 한 개씩 줄이던 것이 어느덧 본격적인 식단이 되었고, 맨몸 스쿼트 10개 하던 것이 어느덧 50개가 되었습니다. 푸쉬업도 30개를 한 번에 하고 있구요. 저번에는 문득 달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달리다 보니 5분이나 달리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할 때마다 깨끗한 방을 보며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쓰레기로 가득했던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죠.
이는 2년 전의 저와 비교하자면 웃음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긴 합니다만 2~3개월 전의 저랑 비교하면 상상치도 못하는 발전입니다.
생각해 보면 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내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2년 전의 저는 운동을 하며 자신감이 붙었던 상태였지만 자존감에 있어서는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을 하였기에 ‘자존감 2’에서 얘기했듯 남들과 비교하며 자존감을 올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끝없이 더 뛰어난 사람을 보며 따라잡기 위해 운동에 욕심을 내다보니 부상을 입기까지 했던 거죠.
반대로 허리를 다치고 살이 찐 상태에서는 자신감도 없었고, 자존감은커녕 매일이 우울하고 무기력하며 스스로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상태였습니다.
방은 점점 쓰레기로 가득 차 발 내딛을 공간도 점차 줄어들었고 맞는 옷은 점차 없어져 갔습니다.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지고 거울 속 자신의 못난 모습이 보여지니 방에서만 보내는 시간이 더 늘어갔죠. 이러한 상황은 마치 늪처럼 느껴졌습니다. 자력으로는 못 빠져나갈 거라는 생각이 만연했던 것이죠.
지금 생각해 보면 늪이 아니라 제가 만든 벽돌로 쌓은 벽인 겁니다. 외부로부터 올 수 있는 시선이나 말들로부터 저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차근차근 벽돌을 만들어 벽을 만든 것이었죠. 그리고 그 벽은 어느 순간 절 가두었기에 더더욱 나가기 힘들었을 거라 봅니다.
그러나 나가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쌓아 올릴 때처럼 하나씩 벽돌을 치우는 것뿐이었죠.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면 지금 경험해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험하지 못했다면 2년 전의 저처럼 교만하고 오만했을 테고,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쌓아 올린, 사실은 비어 있는 종이상자로 만들어진 단상이 높아질수록 그것이 무너졌을 때 더 아팠을 테니까요.
또한, 직접 벽을 쌓아 보고 허물어도 보고 나니까 타인에 대해서 이해심도 더 많아졌습니다. 저보다 더 높이 쌓은 사람도 있을 테고, 현재 쌓아 올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또 사람마다 다양하게 만들겠죠. 예전 같으면 '왜 저러나?'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얼마나 힘들까'가 먼저 생각 듭니다.
사설이 참 길었네요. 그렇습니다. 산책을 하며 사색을 하던 도중 그간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 끝에서 스스로 소리 내어 ‘참 많이 변했네.’라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동시에 ‘2년 동안 나는 참 많이 다양하게 변했는데, 왜 ‘사람은 안 변한다'라는 말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왜 사람은 안 변한다고 말할까?’하고 물음표가 찍혔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은 찾아볼 필요도 없이 간단했습니다. ‘사람은 안 변한다'라는 말 자체가 타인을 보며 하는 말이기 때문이죠.
살이 쪘을 때 아버지가 제게 이런 말을 하셨었습니다. ‘마르고 몸 관리 잘하던 놈이 왜 이렇게 됐지?’라고 말이죠. 그리고 현재는 ‘그래 살 빼니 얼마나 좋아. 이제야 좀 예전 같네.’라고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전 두 번이나 변했었습니다. 살이 찜으로써 한 번, 다시 살을 뺌으로써 두 번. 그러나 아버지는 살이 찐 것으로 인한 변화는 부정하고, 살을 뺀 것으로 인한 변화는 예전에 보던 아버지께서 흡족하시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기에 좋아하신 거죠.
앞서 제 얘기에서 언급했듯, 이제 저는 얼굴만 보자면 예전과 거의 비슷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몸에는 튼살이라는 흔적이 남아 있고, 정신에는 그 기간 동안 느꼈던 정신적 고통이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지금 저에게는 고통이라기보단 성장을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라 느껴지지만, 그 당시에는 고통이었다는 것이 확실하죠.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제가 나쁜 방향으로의 변화하는 것에 있어서는 부정하셨고, 다시 살을 뺌으로서 당신께서 흡족한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에 있어서는 긍정하셨습니다.
저에 대한 예시를 들긴 했지만, 이것만 보더라도 ‘사람은 안 변한다’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사람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안 변한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표현인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도 동일합니다. 고쳐서 쓴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도구에 많이 사용합니다. 반대로 사람에게 쓰는 경우는 그 사람의 행동이나 성격, 습관 등을 교정할 때 사용하죠.
'고치다'의 사전적 의미만 보더라도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고치다
1. 손질을 하여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만들다.
2. 바로잡다.
여기서 ‘구실’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책임지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바로잡다는 것도 동일합니다. '바로잡다'의 뜻은 '그릇된 일을 바르게 만들거나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고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의범절에 있어서도 집안마다 허용되는 것이 있고, 허용 안 되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릇된 일이라는 것의 범위도, 바른 것의 범위도 다릅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고쳐서 쓴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맞춰' 사람을 손질하여 ‘자신이 흡족한 방식의’ 책임을 지게 만든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안 변한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은 변하고, 변할 수 있습니다.
단지 스스로의 필요성에 따라 달라질 뿐이죠. 제가 신발 신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 부분에서 충격을 먹고, 보다 본격적으로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 그 사람이 변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부모 자식 사이나 부부간에, 연인 사이에, 사제지간에, 선후배 간 등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애정 또는 바라는 바에 따라 상대가 바뀌길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러나 그 사람이 변하길 원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맞춰 바뀌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만 제시해 보는 겁니다.
물론 방향성을 제시함에 있어 자신의 얘기를 먼저 꺼낸다면 상대가 바뀔 확률이 조금은 더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찐 저에게 아버지가 이렇게 말을 건네는 거죠.
‘예전에 나도 살쪘다가 빼보니까 불편했던 것들이 많이 사라지고 기분도 좋더라고. 너도 널 위해 한번 빼보면 어때?’
물론 그때의 저라면 조금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당장은 시도하지 않을 확률도 높구요. 그러나 적어도 제 머릿속에 '불편한 것은 사라지고 기분이 좋을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남을 겁니다.
연인 간에도 동일합니다.
상대와 안 맞는 부분이 있을 때 ‘네가 지각하는 게 너무 싫어. 이것 좀 고쳐.’라고 말하기보다는 ‘난 시간 약속을 지키는 걸 좋아해. 날 위해 먼저 나와 있어 줄래?’ 같은 방식으로 하는 겁니다.
이때 알아야 할 것은, 당신 스스로는 이미 그 방향성의 끝지점에 도달해 있거나 도달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고, 반대로 상대방은 그러한 방향성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천재가 일반인 또는 둔재를 바라보는 수준일 겁니다. 스스로는 이미 지난 길이기에 쉽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또는 실제로 당신이 그 부분에 있어서 남들보다 뛰어난 천재성을 발휘한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상대도 쉽게 또는 빠르게 할 수 있을 거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하지 못하는 이를 볼 때 답답함을 지나쳐 화가 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거죠.
하지만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결국 타인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는 부모, 자식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나와 비슷할 뿐, 본래는 타인이기에 같은 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고치길 바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최소한 그 사람보다는 당신 스스로가 앞서 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상대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답답하거나 화가 나는 상황이 적어질 테니까요.
물론 앞서 말했듯 스스로의 필요성에 따라 다르기에 그 방향성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를 시작할지, 말지만을 놓고서도 한참이 걸릴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말을 듣자마자 고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말 자체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각자가 변하기까지의 걸리는 시간은 상대적이고 다릅니다. 누군가는 10초 만에 할 수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10분, 10시간, 10일, 10개월, 그리고 10년이 걸릴 수도 있으니까요.
더 나아가 상대방이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방식이 제가 제시한 방식보다 뛰어나거나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건설적인 대화인 거구요.('건설적인 대화' 글에 보다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렇듯 모두가 다 다르기에 누군가를 바꾸는 것에 있어서는 더더욱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최선일 겁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도구가 아닌 사람이기에, 바뀌는 것에 있어 결과물이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모습을 띌 수도 있죠.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변화했다는 것은 언젠가는 원하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니까요.
그러니 스스로가 또는 누군가가 변화하길 바란다면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보면 각자마다의 '충분한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스스로의 또는 누군가의 변화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