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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3

자부심과 자존심에 대하여

by 물음표


제가 실수했습니다. 저번에 '자존감'에 대해 쓸 때 '자존심에 대해 대충 느낌적으로 알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됐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인의 질문 덕분에 제가 놓쳐버린 부분을 확실히 알게 되면서였습니다.

제가 쓴 글을 읽은 지인이 ‘그러면 자존심은 뭐야?’라고 물었을 때, 저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존감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답을 하고 글을 썼으면서 자존심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자존감과 같은 종류 중 하나라 생각한 자존심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 봤지만 오히려 쉽게 볼 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느껴졌고, 그러다 보니 '자존심은 뭘까?' 하고 물음표가 찍히더군요.

자, 이제 자존심은 과연 무엇이고, 언제 쓰는 건지 같이 알아가 보도록 하죠.


자존심의 일반적인 뜻은 이렇습니다.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


그리고 제가 평소하던대로 한자의 뜻을 직역하면

스스로 자, 높일 존, 마음 심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다행히도 자존감과는 달리 줄인 말도 아니고, 서구권에서만 쓰던 말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한자만 그대로 보면 되기에 비교적 쉽게 느껴졌습니다.


일단 글자만 놓고 보자면 자존감은 스스로를 높이고 중히 여기는 ‘느낌’이고, 자존심은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자존감에서의 느낌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의미이고, 자존심에서의 마음은 인위적임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음도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고, 느낌도 인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떠오르더군요.

그렇지만 처음에 들었던 제 생각에도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서 여러 모로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단어와는 별개로 '자존심에서의 마음'은 인위적인 것이 맞더군요.

'자존심을 부린다, 자존심 세우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 등등 여기서 쓰이는 '심'이 의미하는 바는 '마음을 먹다' 같이 '스스로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존심은 '스스로를 높이기로 마음 먹었다'가 보다 정확한 해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번 글에서 써놨지만 자존감은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높이 여기게 됩니다.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낫다는 것을 알기에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또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높이고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자존심에서는 어제의 내가 어떻든, 오늘의 내가 어떻든, 내일의 내가 어떻든 스스로를 높이기로 마음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먹는 것뿐이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 무엇을 높이기로 했는가도 중요하죠.


우리는 매 순간 거울을 보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각적인 것을 바탕으로 빠르고 쉽게 비교할 수 있는 타인을 놓고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한 기준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향을 기준으로 잡아 놓고 그것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빠르고 쉽게 파악할 수 있는 타인과 스스로를 이상향을 기준으로 비교하며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일반적으로 잘못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인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낫지.’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자 자존심을 부리게 되는 원인입니다.


막상 이상향에 도달하는 방법은 몰라서 그것의 겉모습을 모방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실제로 이상향에 도달했을 때 얻게 되는 생각과 행동은 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며 불만만 많아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누군가가 지적이라도 하면 상대가 자신의 이상향을 무시한다는, 더불어 그런 이상향을 설정한 자기까지 무시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상대에게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높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며, 실제로 그렇지도 않으면서 결정지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행입니다.


사랑하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자존감 올리는 행위를 천천히 해나가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서 칭찬하게 된 것일 뿐 칭찬받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기에, 자존감에는 기준이 존재하지도 평가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른 채 자존심만을 갖는 것은 이상향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 것이고, 이는 사랑하는 나를 강제로 성형시키고 강압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행동은 주변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슬프게 만들며 끝끝내 모두를 떠나가게 만드는 행위가 됩니다.

이처럼 자존심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필요 없는)기준을 세우고, 그에 따라 남과 비교하여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통해 직접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비교하고, 기준이 없는 것에 기준을 세우고, 그것에 맞춰 스스로를 높이는 것을 뜻하죠.


이는 마치 모래성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모래성은 파도에도, 바람에도,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서도 쉽게 무너지죠.

그러나 사실 모래에도, 쉽게 무너질 모래성에도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굳이 가치가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래성을 만든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이죠.

문제는 자존심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모래성 그 자체에만 집착을 한다는 겁니다.

실상은 가치가 없는 모래성 따위를 지키느라 옷과 신발이 젖어 불편해지고, 바람에 의해 머리가 망가지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막느라 그들과도 불화가 일어나는데도 그것의 원인을 파도에, 바람에, 행인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부여하고 지키려고 한 '자신의 행동'때문인데도 말이죠.

이렇듯 자존심을 부리거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모래성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모래성에도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높이 여겨야 할 것은 그러한 모래성을 쌓은 스스로의 능력과 그 능력을 활용한 자신임을 잊은 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자존심인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내용만으로 자존심에 대해 알았다고 하기엔 자존심의 일반적인 뜻이 가진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려는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품위라는 것은 사실 스스로가 판단하지 못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야 알 수 있는 것이죠.

품위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품위 있다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 '품위 있어 보인다'고 말하죠.

이것은 결국 보편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인데, 보편적인 것은 결국 누군가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생각 외로 쉽게 무너진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간단한 예시로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우화가 있지요. 재단사들의 ‘멍청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감’이라는 말 한마디에, 임금과 신하들은 자신이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존심을 세웠기에 임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 믿고 벌거벗고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멍청한 사람이 되기 싫다는,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자존심에 의해 박수를 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던진 ‘왜 벗고 다니냐?’는 질문에 바로 수치심을 느끼며 도망칠 만큼 자존심이란 것은 아주 간단한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이 필요없냐?'라 한다면 그건 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한자만을 가지고 아무리 사색하고 상상해 봐도 답이 보이지 않더군요. 분명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죠.

그래서 자존감에서 익힌 영어를 통해 알아보는 것을 시도해 봤습니다.


자존심은 영어로 pride라고 하는데, pride에는 자존심뿐만 아니라 자부심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자존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부심에 대해서도 알아야 된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치 자존감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니 자존심에 대해 보다 수월하게 이해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자부심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된 것에 대하여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


자부심의 한자를 직역하면

스스로 자, 질 부, 마음 심

‘스스로 짊어지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여기에 제가 해석한 자존감에서 몇 가지를 가져와 더한다면,

‘자신이 짊어진 ‘자신이 지나온 과거 또는 과거의 자신’에 대한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기로 마음먹다’

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실 자부심은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에 가까운 종류의 단어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자존감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하게 되는 말입니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짊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같이 나아가는, 동행하는, 애정하는 존재로 보는 것에 더 가깝죠.

그래서 자부심은 제 식대로 표현하자면,

’짊어질 필요가 없는 것을 짊어진 채 '이것은 이만큼 무거워.'라며 그 무거운 것을 드는 스스로를 당당히 여기고 주변에 자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해석을 한다면 자존심의 뜻은,

‘실제로 그러한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를 높이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자신에게도 주변에게도 관철시키는 마음’과 결이 비슷해집니다.


그리고 이제 pride의 어원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pride는 prud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재밌게도 prud의 뜻이 가톨릭 교회의 칠종죄 중 하나인 ‘오만함(교만)‘의 뜻에 더해 ’타인에 대한 위압적인 대우, 과시에 대한 사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세 영어인 prede로 변형되었는데 이 뜻 또한 재밌습니다. prede는 ‘불합리한 자존감'이란 뜻이라고 하더군요.


자존감은 타인의 평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남과 비교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존감1, 2'를 읽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신의 이상향을 기준으로 타인과 비교하고 평가하는 순간, 오만해지고 더 나아가 남들이 느끼기에 불합리하게 되며,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자존심도, 자부심도 결국 제가 말한 자존감이 바탕에 있어야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자부심은 자존감을 통해 나아가는 스스로를 칭찬하기 위해 쓸 도구일 뿐이지, 남에게 표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연찮게 그것이 넘쳐흘러 누군가가 알아차렸을 때, 그 대상이 그것을 칭찬해 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당당함과 더불어 맞다고 하면 그뿐인 것입니다.

자존심은 주변, 즉 객관적이라 불리는 주관적 요소들의 집합으로부터 자존감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방패이기에,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이용할 필요가 없는 도구입니다.

자존감이 넘쳐흘러 누군가는 나를 존경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시기 질투해 흠집을 내려할 때, 그 대상의 언행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해 오던 것에 대해 굽히지 않는 것,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앞서 쓴 글인 '자존감1, 2'에서 저는 살이 20kg이나 쪄서 90kg가 됐다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 간식 한 가지를 줄였다고 썼습니다.

사실 이것을 시작한 지는 3주 정도 됐습니다.

그 후로 일주일간 간식 수는 안 줄었지만 방을 조금 치우고, 설거지를 바로 하는 등 제 생활이 조금씩 바뀌었죠.

그 후부터 점차 하루 이틀 간격으로 계속 간식의 가짓수를 줄여 현재에는 간식은 전혀 안 먹고, 음료도 제로음료로 바꿨습니다. 물론 아침으로 서브웨이 샌드위치 30cm짜리를 먹는다든가, 저녁에 피자 레귤러 한 판에 스파게티를 먹는다든가처럼 식사는 전혀 안 변했죠.(물론 매일 이렇게 먹진 않습니다.)

운동은 아침에 30분 정도 걷는 걸 일주일 정도 했고, 이 글을 쓰는 오늘에서야 맨몸스쿼트 20개씩 3세트를 처음 시도했습니다.


그 덕분에 3주간 1kg 정도 빠졌습니다. 물론 수분이 감소한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는 3주 전의 저보다, 1주 전의 저보다, 어제의 저보다 나아졌고 앞으로도 나아질 거라는 사실이죠.

물론 중간에 너무 덥다는 핑계로 유혹에 못 이겨 31가지 아이스크림 패밀리 사이즈 한 통을 한 번에 다 먹었습니다. 예전이라면 먹고 나서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고, 그간 해온 것이 다 무너졌다 생각해 '이왕 이렇게 된 거 간식도 다시 마구 먹자.'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죠.

'아 역시 아는 맛이 좋구나! 먹고 나니 뭔가 살찌는 느낌이 드네. 내가 이런 건 또 못 참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아는 맛이 좋으니 다음에도 땡기면 먹자. 확실히 살찌는 느낌은 불쾌하네. 좀 더 살 빠지고 나면 이런 느낌도 안 들겠지? 또다시 못 참겠을 때가 오면 대체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고 말이죠.

이렇듯 저의 자존감은 매일같이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에 도달하기까지의 저를 칭찬하고, 그 행동들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고 있죠.


며칠 전 부모님이 '얼굴 부기가 좀 빠졌네.'라고 말씀하실 때, 당당히 '맞아요. 간식 안 먹고, 걷고 그러니까 살도 좀 빠진 거 같아요.'라고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죠.

이것이 바로 과거 내가 해온 행동들을 당당하게 여기는 '자부심'입니다.


물론 이번 명절에 친척 어르신이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어휴, 살 빼야지 너무 뚱뚱하다. 운동이나 먹는 거는 어떻게 하고 있냐?‘

저는 그래서 당당히 ’간식 줄이고 걷기 운동 좀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듯 친척 어르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거 가지고 살이 빠지겠냐? 헬스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음식도 풀만 먹고 그래야지. 왜 쪘는지 알겠다 쯧.‘

이 말을 듣고 제가 화가 났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 말도 맞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담담하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늘려갈 겁니다. 걷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많이 한다 생각하구요. 제 속도대로 할 겁니다.‘

어떤가요?

당연히 어르신도 자존심 부린다며 질책하셨고, 일반적으로도 자존심 세우는 걸로 보일 겁니다.

그러나 제가 쓴 '자존감1, 2'와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전 스스로가 해온, 존중할 만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지키기 위해 외부의 공격을 '자존심'이라는 방패로 막은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존심의 올바른 사용법이죠.


정리하자면,

'자존감'은 사랑하는 나를 위해 조금씩 더 사랑을 주는 것이고,

'자부심'은 자존감을 올리는 행위를 함으로써 행복해하는 나를 보며 즐거워하고 당당해지는 것이며,

'자존심'은 타인이 타인 자신의 잣대로 한 공격으로부터 사랑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방패입니다.


중국 한나라 5대 황제인 문황제 시기에 황제의 명령이 적힌 문서인 '한서(漢書) 문제기(文帝記) 조서(詔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農者天下之大本

(농자천하지대본)

이는 '농사가 천하의 큰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육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옷(의)과 음식(식), 그리고 집(주)입니다. 그리고 의식주의 바탕은 농사라 할 수 있죠.(참고로 서양에서는 식, 의, 주 또는 식, 주, 의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농사는 현대에 와서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의식주는 중요하지만, 자본주의와 기술의 발달로 예전에 비해 많은 것들이 풍족해졌고 여유로워졌기에, 더 이상 농업을 절대시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러한 현실들을 바탕으로 생긴 많은 문제들로 인해 사람들이 정신, 심리 같은 멘탈적인 부분에 보다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죠.

그리고 저는 자존감에 이어 자부심, 자존심에 대해 쓰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自尊乃人間守魂之根本也

(자존 내 인간 수혼지 근본야)

'자존(自尊)이야말로 인간(人間)의 혼(魂)을 지키는 데 있어서 근본(根本)이다.'


저는 사람의 정신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없어선 안될 것이 자존감이라 생각합니다.

즉, '자존(스스로 존중)'이 인간의 정신, 영혼을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본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자존감을 통해 성숙해지는 데에 있어 사용되는 도구들이 자부심과 자존심인 것이고요.

그렇기에 저는 자존감을 올리는 것과 농사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농사가 작물을 키워서 열매를 얻듯, 자존감은 '나'라는 작물을 사랑과 애정을 바탕으로 천천히 키워나가는 것이죠. (물론 자존감을 올려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자부심은 거름이며, 자존심은 허수아비라 할 수 있습니다.


농사는 내가 원한다고 빠르게 되는 것이 아니죠. 자존감도 마찬가지입니다. 급하게 한다 해서 농사가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망할 확률도 높은 것처럼, 자존감 또한 급하면 전에 언급했듯 부담감을 느껴 오히려 그만두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자부심은 그런 내가 더 잘 자라기 위해 가끔 뿌리는 거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름이 과하면 오히려 농작물이 썩게 되듯, 자부심이 과하면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자존감이 변질되어 오만함만 남을 겁니다.

자존심은 외부로부터 작물을 지키는 허수아비입니다. 하지만 키우는 작물이 없거나 엄청 적은데 허수아비만 많이 세워놓는다면, 본인 스스로는 타당하다 생각할지라도 주변에서 볼 때에는... 뭐 그렇습니다. 자존감을 못 느끼거나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서 자존심만 과하면 위와 같을 겁니다.


부디 올바른 자존감을 바탕으로 적절히 자부심과 자존심이라는 도구를 활용해 여러분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 행복감 등을 충분히 만끽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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