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나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오감 중 시각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뜻이죠.
이것이 뜻하는 바는 '사람은 고유한 특성을 보기 전에 신체적 특성을 먼저 본다'는 뜻입니다.
즉, 미를 기준으로 먼저 분별하고 그에 따라 판단을 한다는 말이죠.
아름다우면 왠지 착할 것 같다는 경험은 대부분 해보셨을 겁니다. 청결하고 단정한 사람과 지저분한 사람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예죠.
그러나 아름답게 생긴 사람이 제비나 꽃뱀이면 외모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겁니다. 반대로 못생긴 사람이 평생 기부를 하고 봉사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다면? 청결하고 단정한 사람이 사기꾼이라면? 지저분한 사람이 소방관이라면?
이처럼 외적인 요소는 누군가를 평가를 하는 데 있어 우선될 내용이 아닐뿐더러 주된 것은 결국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무엇'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평가를 하는 데 있어서도 외적인 요소가 상당한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것 중 가장 쉽고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외모라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실 겁니다. 반대로 타인에 대해서도 동일하지요. 이것이 자신의 외모와 타인의 외모를 비교 평가하게 만들어, 스스로에게 가치를 매길 때 낮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으로 느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름다움이란 것도 결국 주관적인 것으로만 이뤄졌으니까요.
예를 들어보죠.
예전부터 미남이라 불리던 원빈씨나 현빈씨, 장동건씨 등과 미녀라 불리던 이나영씨, 고소영씨, 손예진씨 등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그 당시 최고의 미남, 미녀라고는 했지만 그들의 순위는 보는 각자마다 매우 달랐습니다. 순위뿐만 아니라 별로라고까지 하는 사람도 존재했죠.
좀 더 나아가 보지요. 지금의 10대, 20대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위에 언급한 이들보다 현재 유명한 차은우씨나 뷔씨같은 미남들, 장원영씨나 카리나씨같은 미녀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 안에서도 순위는 제각각일뿐더러 누군가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할 겁니다.
이처럼 아무리 외적으로 아름답고 뛰어나도 모두가 만장일치로 내 취향이라고 하는 사람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아름다움이란 것에 매겨지는 평가도 제각각이고 사람마다 다르다는 겁니다.
조금 더 나아가 볼까요? 잘생겼다,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 유명한 연예인이 스스로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보면 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주관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장동건씨는 '스스로를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현빈씨는 '평범한 내 얼굴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원빈씨는 '스스로의 얼굴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표현했죠.
손예진씨는 '눈 외에는 다 자신이 없다.' 했고,
박보영씨는 '나는 예쁜 걸로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카리나씨는 '거울 속의 나 자신은 예쁘지 않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상하죠?
기만으로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내리는 평가에 왈가왈부하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결국 평가와 가치는 주관적인 것이니까요. 결국 미남미녀든 추남추녀든 외모를 평가하는 것 또한 주관적이란 겁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평가는 인간에게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장미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또는 누군가는 들국화를 좋아할 수도 있죠. 더 나아가 누군가는 꽃보다는 소나무를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은행나무를 좋아할 수도 있을 거구요. 또 돌멩이를 이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같은 장미를 좋아해도 활짝 핀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꽃봉오리일 때를 좋아하는 사람도, 새싹일 때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매우 다양하고, 그래서 기준을 정할 수도 없죠. 인간 또한 자연에 속하는 한 종류의 개체입니다. 그렇기에 각자가 주는 아름다움 또한 다양합니다.
이처럼 외적인 것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으로 이뤄집니다. 물론 스스로에 대해 미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아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누군가가 그것을 부정하거나 별로라고 하는 순간 타격을 입기도 하고 다양한 이유(노화, 사고 등)로 인해 외모의 빛이 바랜다면 결국 그 생각이 없어지기도, 또는 과도하게 집착하기도 하겠죠.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주변인이나 다른 이들의 평가가 아닌, 스스로가 '나도 아름답구나.' 하는 걸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예시를 보고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본인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뛰어난 연예인들도 그러한데 일반인은 더 당연하겠죠.
그렇기에 여기서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그 자체로 충분한지, 아름다운 사람인지 확인해 보는 겁니다.
자, 지금부터 여러분 스스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랑스러운지 알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일단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기 전에 그 어떠한 사람(연예인, 친구, 부모 등등)도 떠올리지 말고, 상대적인 평가(눈이 크다, 코가 높다 등등)를 기준으로 놓지 말고, 거울을 통해 오롯이 본인 얼굴만을 봐보세요.
절대로, 절대로 평가를 하지 말고 그 누구도 떠올리지 말고 본인의 눈, 코, 입, 얼굴에 시선을 집중한 채로 얼굴 전체를 천천히 살펴보세요.
그리곤 살짝 미소도 지어 보고, 윙크도 해보고, 입을 벌려도 보고, 다물어도 보고, 예쁜 짓도 해보고, 멋진 표정도 한번 지어 보세요. 아마 어색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웃음이 실실 나기도 하고, 그러는 모습이 귀엽게도 느껴질 겁니다. 익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죠.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만약 친구가 와서 이런 질문을 한다 해보죠. ‘누군가를 보고 표정이 어색해지고, 보기만 해도 부끄럽고, 웃음이 실실 나기도 하고, 귀엽게도 느껴져. 왜 이럴까?‘라고 말입니다.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너 사랑에 빠졌구나, 그 사람을 좋아하나 보네.'라고 답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당사자는 '나 쟤 좋아하나 봐.'라 할 것이고, 그것을 들은 타인은 '너 사랑에 빠졌네.'라고 할 겁니다.
즉, 이미 우리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을 넘어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니 낮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를 사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어색하고, 살짝은 부끄럽기도 하고, 다소 멍청(좋은 의미에서의)하게 보이지만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한 나에게 이미 사랑에 빠졌는데 어떻게 또 사랑에 빠질까요?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외모가 중요하다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랑에 빠졌다면 외모는 이미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니, 아름답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외모는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닌 것이죠.
이것이 제가 ’신체적 특성을 제외한‘이란 것을 가장 먼저 설명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이나 소중한 것의 외적인 것에 대해서는 실제로 어떻든 간에 이쁘게 봅니다. 더 나아가 사랑을 하면 그 대상에 대해 평가를 하거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나 배우자, 부모님의 외모가 어떻든 간에 상관없는 것처럼 그 대상 자체로 충분하니까요.
(혹여나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하거나 가치를 부여한다고 생각이 드신다면, 그 자체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것을 통해 나타낼 수 있는 스스로를 사랑하는지 고민해 보시면 좋습니다.)
이처럼 자존감에 있어서 외적인 아름다움의 유무 즉, 신체적 특성은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이 중요하고 그 이전에 이미 사랑에 빠지면 외적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니까요.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하면 자존감의 뒷부분인 ’나 자신이 가진 고유한 자질을 통해 발휘되는 스스로의 능력을 특별하다 믿고, 이것을 이용해 이뤄낼 수 있는 업적에 대한 가치를 느끼고 이를 통해 나타내는 자신감‘, 이 문장 또한 쉽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고유하고 특별한 능력을 가졌으며, 뛰어난 업적을 이뤄낼 수 있을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유하고 특별한 능력을 가졌어야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뛰어난 업적을 이뤄낼 수 있어야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또한 아닐 겁니다.
오히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미 그 사람 자체로 고유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며, 뛰어난 업적을 이뤄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지, 뛰어난 업적을 이뤄내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자아존중감에서 존중(respect)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길 사랑스럽고 고유하게 태어났기에 그 존재 자체를 뛰어난 개인으로 바라보는 것이 맞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이는 다른 대상과 비교할 이유도 없고, 비교할 다른 대상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뜻합니다. 애시당초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준이나 규정 같은 게 존재할 리 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죠.
정리하자면 우리는 이미 온전한 존재로, 그 자체로 완벽하기에 자존감이란 것은 이미 갖고 태어났고 이미 스스로를 사랑하는 상태라는 것이죠.
그래서 구태여 스스로를 사랑하려 노력할 필요도 없고, 자존감을 갖기 위해 무언가를 추가적으로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끝낸다면 갖가지 오해를 불러올 겁니다. ‘그럼 자존감을 올릴 필요는 없네?’ 라거나 ‘이미 난 온전하니까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거지?’와 같은 종류의 질문들이 떠오를 테니까요.
이것은 말 그대로 오해입니다.
제가 위에서 '비교할 다른 대상이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다른’ 대상이 없다는 거지 ‘대상’ 자체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나를 비교할 대상은 존재합니다. 바로 과거의 나,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미래의 나 등 ‘나'라는 대상이 말이죠.
즉, 이것은 ’외적’으로는 비교 대상이 존재하지 않지만, ’내적‘으로는 비교 대상인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체적 특성을 제외하면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내 행동’을 보고 '잘했네 못했네.' '그 행동은 좋았어 나빴어.' 등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미래의 나를 생각한다면 현재의 ‘내 행동’을 고치거나 때론 강하게 나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비교적 좋은 결과를 남길 겁니다. 이것이 바로 respect의 어원인 '뒤돌아보다, 고려하다, 살피다'가 ‘깊은 감탄’을 넘어 '존중, 존경'으로 사용되는 이유죠. 단순히 좋은 결과만을 나타낸 것이 아닌 과거를 수정, 보완 또는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만들어 낸 결과, 결과의 좋고 나쁨이 아닌 그 과정의 노력까지 합쳐진 결과를 respect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들을 종합해 자존감(self-esteem)의 뜻을 좀 더 풀어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이미 사랑에 빠져 상관없는) 신체적 특성을 제외한 나 자신이 (이미 온전하게 태어났기에) 가진 고유한 자질을 통해 발휘되는 스스로의 능력을 특별하다 믿고, 이것을 이용해(respect의 의미인 뒤돌아보고, 고려하고, 살펴봄) 이뤄낼 수 있는 업적에 대한 가치를 느끼고 (스스로를 높이고 중히 여김으로써) 이를 통해 나타내는 자신감’
물론 우울증이나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 내 외적인 것에는 이미 사랑에 빠져 제쳐둔다 치자. 근데 내 인생 전반의 행적은 실패로 점철되어 감탄도, 존중도 못하겠는데?’와 같이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정말로 ‘실패’했다면 평가할 필요도, 존중할 필요도 없는 게 맞습니다.
여기서 뭔가 떠오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실패’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죽는다면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못할 것이고, 깊은 감탄도 내뱉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단순히 ‘오답지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면 언제든지 개인이 생각하는 정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답지를 뒤돌아보고, 고려해서 살피는 복습(respect)을 한다면 같은 실수를 할 확률이 낮아지겠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선 제가 쓴 '긍정과 부정'을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즉,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를 만나는 것이 자존‘감’, 즉 나를 존중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자존감을 올린다는 뜻은 '나를 존중하는 느낌을 더 준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생각해서 하는 행동들을 볼 때 더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렇게만 말하면 저도 그렇고 아마 많은 분들이 자존감을 올린다는 행위에 있어서 어려움을 느낄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면 떠오르는 실패(오답지를 알게 되는 과정) 대부분이 강렬하고 큰 상처를 입힌 것이 주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보다 쉽게 자존감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려 합니다.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진다면 그 대상에게 뭘 할까요? 사랑한다 속삭여 주고, 이뻐해 주고, 칭찬해 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 주고, 더 좋은 것을 주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겁니다. 아마 목숨까지도 줄 수 있겠죠.
그러나 사랑에 빠진 지 얼마 안 됐을 때 너무 많은 것을 주면 상대가, 또는 너무 많은 것을 받는다면 스스로가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연애하기로 한 날에 빚을 내 비싼 차를 사주고 집을 사주고, 유명 셰프를 불러서 요리를 대접하고 더 나아가 신체포기각서를 쓴다면 말이죠. 부담스럽죠. 매우 부담스러울 겁니다. 또 더 나아가 의심까지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소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행동이나 선물을 한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자면, 첫 데이트에 한 송이 꽃을 선물한다든가, 상대가 흘러가듯 얘기했던 음식점에 데려간다든가, 전시회를 예매한다든가, 산책 중에 먹을 간단한 간식을 만든다든가 말이죠. 준비하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고, 받는 사람도 부담은커녕 감동을 받을 겁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나에게 있는 큰 문제부터 해결한다는 것은 준비하는 나도, 그것을 받을 나에게도 부담을 주는 행위입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어떨까요? 내가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불편하지 않도록 고치려고 노력할 것이고, 나로 인한 게 아니라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그것을 고쳐 보거나 치워 없애거나 할 것입니다.
저를 예시로 놓고 보자면, 운동하다 다친 이후로 살이 많이 쪘습니다. 20kg 정도가 쪄서 90kg 정도가 됐죠. 씻는 것도, 걷는 것도,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하다 못해 신발을 신는 것도 힘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니 많은 것들이 불편해지더군요.
이 상태에서 제가 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대부분 살을 빼야 하니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 식단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 들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힘들고 고통스럽기에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데에 있어 어렵고 부담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했듯, 사랑하는 내가 불편하다면 일단 고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헬스장을 등록하고 식단을 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에 중독되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우울한 상태인 저에겐 매우 부담스러운 행동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한 것은 '간식의 가짓수를 줄이자.'였습니다. 정말 사소하죠?
살을 빼겠다는 사람이 간식을 아예 안 먹는 것도 아니고 가짓수만 줄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종류의 간식을 먹는 어제의 나보다 한 개라도 줄인 오늘의 내가 나아졌고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자랑스럽게 여겨도 된다는 것이죠.
이처럼 자존감을 올리는 행위는 급할 필요도, 많은 것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 할 것들은 큰 게 아닙니다.
방에 어질러져 있는 이불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방에 있는 휴지조각을 줍는 것만으로도, 아침에 일어나 사랑하는 가족에게 웃으며 좋은 아침이라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을 올리는 것이며, 어제의 나보다 나은 오늘의 내가 되는 겁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자. 남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고귀한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자기 자신보다 우수한 자가 결국에는 고귀한 자가 되는 것이다.‘
어제와 동일한 나에게 오늘의 나는 충분히 높고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나라는 사람도 충분히 존중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이 점에 있어서 타인의 의견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제의 나보다 나아졌다는 것이니까요.
물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고, 못 했다는 것은 유지했다는 뜻이니까요.
또, 어제보다 나빠지거나 못해도 괜찮습니다. 어제보다 나쁘다는 것을, 못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죠.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앞서 말했듯 실패란 결국 과정의 일부이며, 실패했다는 것은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뜻이기에 이 또한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나라는 뜻이니까요.
자존감이란 것은 내려가지 않습니다. 이미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낫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아주 조금씩, 사랑하는 나를 위해 사소한 것들부터 천천히 해 나가도 됩니다. 사랑하는 내가, 나를 생각하고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행복할 테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고 행복을 느끼고 즐기는 데 집중하며 나아간다면, 어느덧 스스로의 존중을 넘어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는 상황에 다다라 있을 수도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