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 끝만 보는가?
유튜브를 보다 우연히 '테세우스의 배'라는 난제를 보게 됐습니다.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라는, 소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괴인을 죽인 후 아테네로 귀환할 때 타고 있던 배를 아테네 사람들이 대략 500년 정도 보존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배를 유지 보수해야 하니 썩은 나무판자는 떼어버리고 새 나무판자로 교체했겠지요.
이렇게 한 개의 나무판자를 새 걸로 교체한다 한들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다시 다른 판자를 교체한다 해도 동일할 테고요.
하지만 500년 동안 보수를 하다 보면 당연하게도 어느 순간 테세우스가 탔던 배의 판자는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참 읽기만 해도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법한 질문이란 생각이 절로 일어나더군요.
그러나 저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 물음표가 찍혔습니다.
주된 질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거 같은 부분인 ‘왜 테세우스의 배를 유지 보수했지?‘에 궁금증이 생긴 겁니다.
일단 테세우스에 대해 찾아봤습니다.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와 더불어 그리스를 대표하는 2대 영웅으로서 지혜와 용기의 영웅이라 불립니다.
(헤라클레스는 힘과 불굴의 영웅이라 불리고요.)
그리고 테세우스가 아테네를 대표하는 영웅이 된 일화가 바로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일화입니다.
저는 그리스 신화를 어릴 적 만화로만 접했기에 그저 괴물을 죽여 영웅이 된 줄 알았습니다. 허나 단순히 괴물을 죽였기에 영웅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있던 곳이 당시 해상 강국이었던 크레타라는 나라였는데, 크레타의 왕자가 아테네에 갔다가 모종의 이유로 죽었고 이를 빌미로 아테네에게 미노타우로스의 밥으로 시민들을 바치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맨손으로 때려죽인 것입니다.
즉, 단순히 괴물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 괴물에게 먹힐 수 있었던 많은 아테네 시민들을 구하게 된 것이죠.
그렇기에 영웅 테세우스가 타고 갔다 왔던 배가 상징물로써는 가장 적격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의 배를 보거나 떠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테세우스의 영웅적인 일화를 떠올리거나 테세우스의 지혜와 용기를 떠올렸을 겁니다. 그리고 감사함도 느꼈겠죠.
여기에서 저는 제 궁금증에 대한 저 나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이 배를 500년 가까이 유지 보수해 온 이유는 '영웅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한' 거였던 거죠.
답이 너무 간단하고 당연한 내용이라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게 아닙니다.
저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니기에 그 시절에 어떤 이유로 테세우스의 배를 유지 보수해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수하느라 거의 대부분이 교체된 배가 과연 테세우스의 배냐?'는 질문에 답을 함에 있어서, 이 해답이 저에겐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전설적인 인물이나 뛰어났던 영웅들을 기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용기와 지혜, 그 외의 다양한 행동 등 그들이 살았던 삶의 여정과 그들이 가졌던 뜻을 칭송하고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겠죠.
그렇다면 그들의 삶과 뜻을 칭송하고 기억하는 이유는 뭘까요?
저는 그 이유가 '본받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위대하고 훌륭했던 위인들을 기림으로써 그들의 영웅적인 면모를 본받아 그들처럼 용기나 불굴의 의지, 지혜, 힘, 선함 등을 실천하게 하는 것, 이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내린 해답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테세우스의 지혜와 용기, 더 나아가 그가 가지고 있던 뛰어난 무언가를 그가 탔던 배를 보며 떠올리게 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테세우스처럼 영웅적인 면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오랜 기간 유지 보수를 했을 것이다.’
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만의 해답을 바탕으로 다시금 본 질문인 ’테세우스가 탔던 배의 부품이 순차적으로 전부 교체되었더라도 그것을 테세우스의 배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해보겠습니다.
답변하기에 앞서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이 난제를 다음과 같이 꼬았다고 합니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낡은 판자를 새 걸로 하나씩 갈아 끼우는 방식으로 전체가 바뀐 배를 배1이라 하고, 배에서 나온 낡은 판자를 버리지 않고 하나하나 모아놨다가 다시 테세우스의 배와 똑같이 만든 배를 배2라고 한다면, 배1과 배2 둘 중 어느 것을 테세우스의 배라 할 수 있는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원래의 문제나 토머스 홉스가 꼬았다는 문제나 해답은 동일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홉스의 질문으로 대답하기가 더 쉬워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정의는 정말 간단합니다.
국립 국어원에서 조사인 ’~의‘가 뜻하는 바를 살펴보면
‘뒤 단어가 나타내는 대상이 앞 단어에 소유되거나 소속됨을 나타내는 경우’에 쓰인다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나의 옷, 그의 가방, 영이의 얼굴, 우리의 학교, 어머니의 성경 책 같은 게 있겠죠.
이를 바탕으로 보면 테세우스가 ‘사용하고 있거나 소유’하고 있어야만이 테세우스의 배인 겁니다. 이는 뜻만 본다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렇기에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테세우스의 소유가 아닌 순간부터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르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테세우스가 아테네에 넘겼다면, 개인의 소유가 아닌 나라가 소유권을 가진 것이니 아테네의 배라 불러야 하는 것이 옳다고 봐야겠죠. (혹은 일개 상인에게 넘겼다면 ’상인 아무개의 배‘라 칭해야 하는 것이 맞겠죠.)
또한, 테세우스가 죽고 아테네라는 나라의 소유가 됐다 한들 이 또한 아테네의 배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겁니다. (더 나아가면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배라 불린다든지, 또는 노예 아무개가 만든 배라 불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테네의 배,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 테세우스의 배라고 칭해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아테네의 지도자, 그리고 시민들이 모두 동의했기에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일 겁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흔하디 흔한 나무로 이루어진 한낱 배에 영웅의 이름을 붙인 것에 아테네 전체가 동의한 이유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테세우스란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그가 탔던 배이기 때문이겠죠.
그렇기에 집중해야 할 것은 '왜 오랜 기간 동안 그 배의 이름을 그대로 두고 유지 보수까지 했는가?'입니다.
예시로 든 아테네의 배나 아무개의 배처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면 그것을 유지 보수하고 기념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죠.
이 점이 위에 언급했던 제 궁금증의 해답이 가장 중요하다 말한 이유입니다.
바로 ’그의 영웅적인 행보, 면모를 기리기 위함‘ 말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테세우스의 배’란 이름의 나무판자 뭉치가 실상은 영웅 테세우스가 가지고 있던 영웅적인 면모를 떠올리고 본받을 대상으로서의 기념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테세우스의 배‘에서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 ‘테세우스’의 배로 불러야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본다면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질문은 답하기가 매우 쉬워집니다.
유지 보수를 위해 판자가 ’전부 새로 바뀐 배‘도,
최초에 테세우스가 배에 타고 있었을 때 존재했으나 ’교체 되어버린 낡은 판자‘도,
그리고 낡은 판자들로 만든 ’또 다른,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낡아빠진 테세우스의 배‘도
전부 ’테세우스‘의 배가 맞습니다.
(물론, 테세우스의 영웅적인 면모에 대한 것을 테세우스의 ‘이야기’로 칭송하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이미 테세우스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를 좀 더 풀어 설명하자면, 유지 보수된 ‘배’를 보고 테세우스의 영웅적인 면모를 떠올린 사람한테는 그것이 ’테세우스‘의 배라는 겁니다.
반대로 낡아서 교체된 판자를 이용해 만든 구 테세우스의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죠.
더 나아가 교체된 낡은 판자 서너 개를 보며 ‘테세우스’의 배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전부 교체된 ‘배’도, 낡아버린 판자들로 만든 ‘배’도 누군가에게는 ‘테세우스’의 배라 불릴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난제에 대한 저의 답을 정리하면,
질문 자체가 ‘관념적인 부분’, 즉 ‘테세우스’의 영웅적 면모를 기리기 위한 것을 ‘물질적인 부분’인 ‘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헷갈리게 만들어 혼란을 주는 질문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굳이 정답을 내놓자면 ‘테세우스’의 배는 그 어떤 것이든 ‘테세우스’의 배라 부를 수 있으며, 하다 못해 종이 돛단배라도 ‘테세우스’의 배라 부르는 이가 있다면 그 또한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테세우스’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무엇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러야 하는가는 각 개인이 결정하는 부분이고, 결코 통합되거나 한 개의 답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내린 결론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에 테세우스가 노년에 어린아이의 인육을 즐겨 먹는 미치광이 강간 살인마가 되어 나라를 멸망시킨 폭군이 되었다면 테세우스의 배가 같은 의미로서 다가왔을까요?
또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 시민들이 유지 보수를 하였을까요?
장담컨대, 아닐 겁니다.
아마 테세우스라는 이름이 욕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 테세우스 같은 놈’하고 말이죠.
물론 (미친 사람일 확률이 높은) 누군가는 예시로 든 미치광이 테세우스의 일면을 닮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더해서 실제 ‘테세우스’의 배를 보고 그가 했던 실수들을 떠올리며, 스스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다짐할 수도 있겠죠.
'견지망월'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세간에는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 끝만 보는가?‘라는 문장으로 더 알려져 있지요.
이것은 정작 중요한 것은 제쳐두고 사소한 것에 집중한다는 뜻으로,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난제 ‘테세우스의 배‘ 또한 이와 마찬가지죠.
이 문제의 핵심이 ‘테세우스’ 임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에 해당되는 배에만 집중했기에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싶어.’라는 말을 듣고 '무슨 밥이지?' '그때와 똑같은 레시피로 만드는 게 중요할까?' 같이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 집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장에서의 본질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따뜻함, 사랑 등’이 담긴 밥이 먹고 싶다는 뜻이지 밥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닌 것처럼 말이죠.
이처럼 배나 달, 밥같이 실체를 가진 것에는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 자체로 온전하기 때문이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집이라는 그저 벽과 지붕으로 이뤄진 구조물에 불과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가족과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안식처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투자 수단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몹시 주관적이며,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거기엔 정답도 없을 겁니다. 각 개인의 사고방식을 수학적 계산식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