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건설적인 대화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그저 타인과의 대화로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과 대화하는 대상만의 고유한 경험과 사고방식을 간접 체험하는 것이 즐겁고, 이를 통해 무언가가 나아진다는 느낌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건설적인 대화를 좋아한다기보다는, 평소에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 각자의 대화 내용이 점차 진지해지거나 무거워지곤 하는데 이런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물론 나름의 농담이나 상대의 유머러스함에 따라 환기가 되곤 하지요.)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내적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해당 내용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려고 하거나 해결책에 대해 논의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화가 늘 좋진 않습니다.
하다 보면 제가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고, 화를 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상대 또한 마찬가지고요. 친했던 관계가 대화 후 나빠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통쾌함을 느끼거나 상당히 즐거워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색했던 사이가 대화 후 절친한 사이가 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하다 보니 진짜 건설적인 대화는 무엇인지 물음표가 찍혔습니다.
국어사전에 있는 ’건설적‘의 뜻은
'어떤 일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것'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건설적인 대화'를 좀 더 세세하게 풀어보자면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말을 통해 어떤 일을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
입니다
왜 ‘모두에게’에 표시를 했을까요?
‘모두‘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저도 모르게 은연중에 실수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간략한 예시로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해야지.'라는 말에서 '모두'의 뜻은 나와 너를 뜻한다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너’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부분은 친분이 깊을수록, 오래될수록 더욱 두드러집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 경우, 부모는 자식을 아기 때부터 키워 왔고 내 자식이니 나와 비슷할 거라고 당연히 여길 겁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요.)
추가로 걱정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들어 어느 순간 자식과 대화할 때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될 겁니다.
‘네가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 순종적인 자식이라면 따르겠지만 그조차도 불만을 갖는 게 태반이며 사춘기일 경우에는 다툼으로 이어질 겁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앞서 말한 거와 같이
‘(내가 생각하는 자식인) 네가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라고 얘기하기에 다툼이 발생하는 겁니다.
자식은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닌 것은 당연하며 ‘부모인 내가 생각하는 자식’과 ‘자식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격차는 생각보다 훨씬 클 겁니다.
반대로 자식 입장에서 오래 봐온 부모님에게 하는 대화도 동일할 겁니다.
'아빠는 후줄근하게 있는 걸 좋아해.'
'엄마는 남은 음식을 더 좋아해.'
자식도 ’내가 생각하는 부모‘를 기준으로 잡고 얘기를 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하는 부모’와 ‘부모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격차도 엄청날 겁니다.
이처럼 스스로가 그간 봐온 상대의 모습을 근거로 사실상 일면에 불과한 부분을 상대 그 자체라 판단하고 실상은 나에게만 건설적인 대화, 나에게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대화를 ‘모두에게 건설적이다.’라고 생각한 거였습니다.
이러한 대화는 실제로도 ‘내가 생각하는 상대‘가 아닌 상대 스스로에게는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이어서 필요성을 못 느끼는 대화였을 확률이 높았을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이렇게 되면 상대는 대화에 참여를 덜 하게 되고, 수동적인 형태가 되거나 적대적으로 나오게 되고, 점진적으로 대화 자체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즉, 제가 그간 해왔다고 생각한 건설적인 대화는 상대나 상황에 따라 우연의 일치로 건설적인 대화의 면모를 띈 것뿐이지 실상은 상대가 느끼기에 저 스스로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대화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건설적인 대화란 무엇인가?
건설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습니다.
건설적인 대화에 앞서 '진정한 대화'를 먼저 하는 겁니다.
부부간의 건설적인 대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부부간의 건설적인 대화란
부부 관계 및 가정의 일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대화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대부분은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대화는 무엇일까?'가 궁금하실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궁금증입니다.
'좋은 방향이 무엇인지'를 먼저 궁금해하셔야 합니다.
왜 좋은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야 할까요? 그것은 각자가 생각하는 좋은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좋은 방향이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는 화목한, 부부 금슬이 좋은 가정을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화목의 정의와 좋은 부부 금슬에 대한 정의는 비슷할 수는 있어도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서로가 보고 자란 가정환경이 다르고 그에 따른 해석도 다르기 때문이죠.
누군가가 좋다고 생각한 관계를 누군가는 나쁘다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서로 배려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배려했음에도 싸우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 원인이 바로 배려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죠.
누군가에게는 좋아하는 반찬을 상대의 밥에 놓아주는 게 배려일 수도 있지만 상대에게는 부담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모두’에게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상 앞서 언급했듯 나와 ‘내가 생각하는 너’에게 좋은 방향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건설적인 대화 전에 '진정한 대화'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대화란 말로써 생각한 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대화란
1. 내가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
2. 상대가 표현하는 것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
을 뜻합니다.
즉,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왜 싫어하는지
내가 A란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등과 같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해야 됩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상대가 나와 같이 스스로에 대해 표현한 것을 ‘그대로’ 이해하는 겁니다.
이 부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대화에서의 이해는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닌, 그 자체를 인정해 주는 것까지를 뜻합니다.
상대의 생각하는 바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지만, 그 생각 자체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판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바로 위에 서술했듯 각자마다 경험이 다르고, 그에 따른 해석이 다른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옳은 방법이 누군가에게는 틀릴 수 있기에 상대의 생각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서는 상대 스스로만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연인이 데이트를 한다고 해보죠.
식사를 하러 피자집에 가서 어떤 피자를 주문할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상황입니다.
논란이 많은 파인애플 피자에 대해 대화하는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누군가는 격렬히 싫어하고 누군가는 좋아하는 상황이라면 분명 다툼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왜 싫어하고,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서로 얘기를 하고, 그를 이해 또는 인정한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지겠죠.
‘난 파인애플 피자를 좋아해. 돌아가신 할아버지(또는 할머니)가 내가 놀러 가기만 하면 파인애플피자를 사주셔서 늘 먹곤 했는데 그게 정말 좋았거든.’
또는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과일이 파인애플이라 어디에 들어가도 난 정말 좋아.’
어떤 이는 이런 얘기를 하고, 다른 누군가는
‘난 파인애플 피자를 싫어해. 어릴 적에 날 괴롭히던 놈들이 억지로 토할 때까지 엄청 먹였거든.’
또는
‘파인애플의 맛과 향이 느껴지면 피자가 너무 역겨워져서 못 먹겠어.’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다고 해보죠.
그리고 상대의 얘기를 이해하고 인정해 준다면, 과연 다툼이 일어날까요?
아닐 겁니다. 나에게 파인애플 피자는 음식이 아닌 수준일 수도 있지만, 상대에게는 소중한 음식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물론 상대가 얘기한 바를 이해하고 인정했다면 상대와의 관계 또는 이유에 따라 가벼운 농담을 할 수는 있지만 이게 다툼으로 이어지진 않을 겁니다.)
이렇게 나에 대해 나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상대가 이해해 주고, 상대에 대해 상대의 생각을 내가 이해했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대화를 한 것이며, 건설적인 대화를 하기 위한 시작점에 서게 된 것입니다.
(혹시나 염려스러운 마음에 언급합니다만 제가 말하는 진정한 대화란 상대가 건설적인 대화를 할 만한 상황이나 의지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의 진정한 대화이지,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어떤 상황인지 간에 하는 대화를 뜻하진 않습니다.)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셨다면 이제는 건설적인 대화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할 겁니다.
건설적인 대화란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대화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대화‘입니다.
이는 건설적인 대화를 할 때마다 '무조건 결론을 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한 연인 사이의 파인애플 피자를 예로 들자면, 오늘은 배가 많이 고프니 일단 일반 피자를 먹고 디저트를 먹으며 언젠가의 데이트 때 먹을 피자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죠.
또는 일반 피자에 절반만 파인애플 토핑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직원에게 물어보고, 안된다면 다음번에는 그게 가능한 가게를 같이 찾아보자는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건설적인 대화는 서로에게 좋은 방향에 대한 ‘공통된 정의‘(또는 합의점)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지, 도착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생각에 대해 표현하고, 이해하고, 인정하며, 나아가 서로를 위하고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 진정한 건설적인 대화인 겁니다.
그리고 진정한 건설적인 대화로 얻게 되는 가장 큰 소득이 있습니다.
건설적인 대화로 서로를 위하고 존중하게 되면 나의 장점으로 상대의 단점을 도와주거나 보완해 줄 방법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는 겁니다.
또한 떠오른 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합의점으로 나아가기가 훨씬 수월해지지요.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배려심’, 이러한 행동을 ‘배려’라는 단어로 씁니다.
예를 들어 직장 동료 간에도 이러한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다른 부서와 협업을 할 경우에 자신의 부서 상황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상대 부서의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인정하고, 이를 통해 이번에는 도움을 받고 다음에는 도움을 주겠다든가 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배려를 바탕으로 한 행동입니다. 물론 말을 안 해도 알아채고는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겠죠.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발생할 겁니다.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 ‘내가 생각하는 상대’로 설정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면 대화를 하는 것이 먼저이고, 이를 통해 상대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따라 필요한 부분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동료 간의 건설적인 대화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얻게 되는 것은 당연히 업무의 효율이 올라간다든가 회사의 이익을 통해 보너스를 받게 되는 것이겠죠.
물론 대화로 나는 이해하고 상대를 존중하며 배려했지만, 상대는 그러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합의점을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면 내가 한 배려가 손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얻기 위해 감수해야 되는 거라고 받아들이고, 본인이 감수했다는 것에 대해 상대에게 확실히 인지시켜야 합니다.
여기서 확실히 인지시킨다는 뜻은 화를 내거나 큰소리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알리고 그에 대해 상대가 인지했다는 답을 듣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두 회사가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A회사는 금액을 낮추는 대신 기간을 늘리려 하고, B회사는 금액을 유지하길 바란다고 해보죠. 여기서 B회사가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이때 A회사 입장에서 합의점을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면, 금액을 올리고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장기적인 협력에 따라 얻게 될 것들을 생각하며 이번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B회사에게 ‘우리가 계약 금액을 양보하는 것은 귀사와 장기적으로 협력하기 위해서이니, 이 점을 명확히 감안해 주시길 바랍니다.'와 같이 알리는 것이죠. 보통은 B회사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같이 나올 겁니다.
물론 그다음에도 안 지키는 경우가 많죠. 요새는 녹음하는 게 일반적이라 녹음으로 해결되면 좋겠지만, 아닐 때도 있기에 이런 경우에는 A회사 입장에서 절대적으로 상대가 필요하다면 그 또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고, 아니라면 다른 방법으로 나가야겠죠.
또 다른 예시로는 친구나 연인끼리 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했다고 해보죠. 당신은 비용 문제로 저렴한 숙소를 원하고, 상대는 비용과 관계없이 편안한 숙소를 강력히 원하고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이때 당신이 관계 자체를 더 중요시한다면, 상대의 고집으로 인해 불필요한 비용을 더 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지속하게 되어 얻게 될 즐거움을 위한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와 동시에 상대에게 확실히 알려주는 겁니다.
‘이번 여행에서 너와 즐겁게 다니고 싶어서 내가 조금 더 부담을 하고 네 의견에 따랐으니, 다음에는 가능하면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하자.’ 같이 말이죠.
비즈니스와 달리 비교적 편한 관계이기에 상대가 ‘알았어, 고마워.’라고 답하지 않는다면 그 부분까지 지적해도 됩니다. ‘이럴 땐 고맙다고 해줘야 나도 즐겁게 다니지.’ 같이 말이죠.
만약 이 또한 상대가 투덜댄다면 관계에 있어 좀 더 고민해 보시고 다음으로 나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다른 하나는, 합의점을 무조건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건설적인 대화도, 진정한 대화도 안 하는 관계의 단절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같은 공간에서 머물게 될 경우에는 무관심과 무관용으로 일관하는 것이고, 같은 공간에서 머물지 않아도 된다면 한국말로 '연을 끊는다'는 말처럼 두 번 다시 연관되지 않으면 되는 것이죠.
정리하자면,
건설적인 대화란
1. 앞서 진정한 대화를 통해 ’내가 생각하는 상대‘가 아닌 '상대 그 자체'에 대해 이해하고
2. 서로가 서로를 이해했다면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합의점에 대해 논의하는 것
이 두 가지만을 뜻합니다.
사는 동안 무수히 많은 대화를 할 겁니다. 그중에는 정말 간단한 내용도 있을 테고, 실없는 농담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건설적인 대화는 필수불가결합니다.
건설적인 대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두’에게 좋은 결과물이 주어지는 것은, 대화로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바탕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했기에 이뤄진 것이겠지요.
'언어는 마음의 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란 언어로 이루어진 의사소통 수단 중의 하나이고요.
의사소통은 한자로 '뜻과 생각이 서로 잘 이어진다'
이며, 영어로는 communication입니다. ‘나누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ummnicare가 그 어원이지요.
즉, 언어를 통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나누고 그 뜻이 서로 잘 이어지는 것이 대화입니다.
이를 더 잘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창을 보다 활짝 여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창을 활짝 열기 위해서는 아마도 배려심, 존중심, 이해심이라는 힘이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배려, 존중, 이해의 힘을 통해 마음의 창을 활짝 연 사람들이 ‘모두 다 같이’ 행복해지는 여정이 바로 건설적인 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