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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1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

by 물음표


산책을 하던 중에 소크라테스가 말한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라는 문장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학생이었던 시절에 겸손에 관한 명언으로 교과서에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과연 정말 겸손에 대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더군요. 분명 배우기는 겸손으로 배웠는데, 문장을 곱씹어 볼수록 저도 모르게 오만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겸손에 대해 잘못 안 것일까? 아니면 저 문장이 겸손에 맞지 않는 내용일까?'

고민하다 보니 문득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겸손에 대해서 그간 해오듯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죠. 이 생각이 들자마자 '겸손이 뜻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일까?' 물음표가 찍혔고 바로 집으로 가 찾아봤습니다.


겸손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


제가 어슴푸레 알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뭔가 가슴 깊이 이해되진 않더군요. 그래서 어원을 찾아봤습니다.


겸손은 겸손할 겸(謙)과 겸손할 손(遜)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그러나 겸손하다는 뜻이 두 번이나 들어간 것이 이상하게 느껴져 더 찾아봤지요.

겸손할 겸(謙)은 말씀 언(言)과 겸할 겸(兼)이 합쳐진 글자로 '말을 겸하다'는 뜻이 됩니다. 겸하다는 것은 두 가지 이상의 것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말을 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말이란 것은 주로 대화할 때 사용하게 됩니다. 대화가 없는 말은 혼잣말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죠. 그렇다면 대화를 하며 말을 할 때 두 가지 이상의 것을 아울러 가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제가 '건설적인 대화'에서 대화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상대가 표현하는 것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여기서 상대가 표현하는 것을 ‘그대로’ 이해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 입장이 돼봐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과 내 입장을 아울러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것'이 '말을 겸하다'의 뜻이 되는 것이죠.

즉, 대화하는 것에 있어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것을 아울러 내 입장을 표현하는 것은 상대 입장에서는 이해심과 배려를 느낄 수 있고, 이것을 제삼자가 본다면 남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겸손할 겸(謙)자가 된 이유로 보입니다.


겸손할 손(遜)은 쉬엄쉬엄 갈 착(辶)과 손자 손(孫)이 합쳐진 글자로 '손자가 쉬엄쉬엄 간다'는 뜻이 됩니다.

손자가 쉬엄쉬엄 간다는 것이 겸손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손자라 함은 어린아이를 뜻합니다. 그런데 힘이 넘치는 아이들이 쉬엄쉬엄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도 쉬엄쉬엄 가는 이유는 앞에 윗사람이 있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다들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여기서 스승은 단순히 가르침을 내려주는 사람만을 뜻하지 않고, 군사부일체로서 임금과 스승, 아비를 뜻합니다. 즉, '존경하는 윗사람의 그림자조차 소중히 대한다'는 뜻이죠.

앞지를 힘이 있음에도 존중하는 대상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천천히 따라간다는 것은 제삼자의 눈에는 윗사람을 위해 물러선 것처럼 보이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에 겸손하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 제 해석으로 '겸손'을 표현하자면,


말을 함에 있어서는 듣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고 배려하며 존중하고, 그러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행동이 나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을 한번 살펴보기에 앞서, 일단 그가 왜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란 말을 했는지 그 배경부터 먼저 알아보죠.

일반적으로 알려진 저 말이 나온 이유는 고대 그리스의 국가이며 신탁으로 유명했던 델포이의 신전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라는 내용이 언급되었다고 합니다.

신탁 자체는 믿었지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확신했던 소크라테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유명한 소피스트(지혜로운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현명함을 시험해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내린 결론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저들은 저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였고, 그렇기에 자신이 가장 현명한 이유는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은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화에 대해 찾아보고 알게 되니, 더더욱 이 유명한 문장이 전혀 겸손하지 않은 문장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부터 살펴보죠.

보통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알 방법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에 관한 것을 물었을 때, 그때서야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에 따라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한글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대다수의 한국사람들은 당연히 세종대왕을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외국인에게 묻는다면 한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한글은 알지만 누가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움을 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느 외국인이 ‘나는 한글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고 해보죠.

어떻게 보입니까? 저는 ‘저 말을 왜 하나?’ 싶은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당연히 겸손과는 관계도 없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은 겸손을 이루는 한자 중 '손'에 해당되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에 완벽히 위배되는 말인 것이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혹여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겸손한 것입니다.

단순한 말일지라도 저 유명한 문장은 결국 다른 ‘모르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는 발언인 것이죠.


그리고 뒤 문장인 ‘그러나 저들은 저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를 살펴보자면 이 또한 겸손과는 거리가 먼 발언입니다.

그 당시 유명한 소피스트들을 어떤 방식으로 시험한 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진리에 관해서 묻거나 그들의 현명함에 대해 시험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따지자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누군가를 시험할 수 없습니다. 본인도 답을 모르는 문제를 내놓고 그것에 답을 못하면 현명하지 못한 거라니, 현대 수능에서 이런 문제가 나온다면 시위를 벌일 정도의 엉뚱한 행동인 것이죠.

물론 소크라테스는 그 특유의 질문법을 통해 그들의 논리에서 오류를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른다면 그것이 오류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죠. 진리나 현명함은 같은 것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 오류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이는 현대 물리학인 양자역학의 일부분을 통해 바라본다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세상은 모순되는 것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라고 불리는 것 또한 모순되는 것이 공존할 수 있는 거겠죠.

그렇기에 그 당시 소피스트들의 논리가 오류처럼 보이거나 모순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진리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소크라테스조차 진리가 무엇인지는 모르니 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시험의 결과는 답이 존재할 수 없는 소크라테스의 주관으로만 이뤄진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놓고 소피스트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도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을 존중하지도, 답을 알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도 않는 오만한 발언인 것입니다.

이렇듯 겸손한 것처럼 보였던 문장은 사실 겸손하지 않은 문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재밌는 사실이 있는데요.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플라톤이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책에 나온 ‘나는 알지도 못하고,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라는 말을 더 짧게 의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또 다른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검토하며 자신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배움을 청하고자 소피스트들을 찾아다니지 않았을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끝없이 돌이켜보고, 자신의 논리나 생각을 검토하며, 진리를 찾아다녔을 겁니다.

반대로 소피스트들은 스스로 안다고 믿고, 지식과 지혜를 설파하며, 돈과 명예를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소크라테스는 도장 깨기를 하듯 그들을 격파하게 되고, 끝끝내 죽음에 이르렀을 수도 있겠죠.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는 겸손하게 살았을지라도, 그의 겸손함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은연중 그것에 질투심을 느끼고 오만하게 해석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이 담긴 논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앎이다.’


예전에 지인과의 대화 중 제가 모르는 것이 나왔는데,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 무시당할 거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그만 아는 척을 했고, 이후 결국 이에 관해서 잘 모르는 것이 알려져 창피를 당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만약 바로 모른다고 하고 물어봤다면 창피를 당할 일이 없었을 것이고, 상대가 그러한 이유로 저를 무시했다면 저에 대한 존중이 없기에 둘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을 과장하지 않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며,

상대가 아는 것을 인정해 주고,

상대가 모르는 것을 친절히 알려주는 것

이것이 바로 '겸손함'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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