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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by 흐름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이러다 뇌혈관 터지는 건 한 순간이다 싶다. 붙잡고 있는 다고 지금 해결할 수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우선 퇴근한다. 내가 왜 이일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열심히 찾지만 월급 외엔 답이 없다. 나는 회사에게 내 시간을 팔았다. 주어진 일을 하면 된다. 그게 내 일이다. 단념해보려 하지만 이렇게 살다 가면 너무 억울하다. 대책 없이 회사를 나가기엔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다. 터덜터덜 요가원으로 향한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겨울을 지나온 앙상한 나무 가지 끝 저마다 꽃망울이 맺혔다. 계절에게 시간을 내준 적도 없는데 이 놈의 봄은 잊지도 않고 또 찾아온다.


‘살아가느라 힘들지.‘ 정희가 무심코 툭 건넨다. 정희는 짝꿍의 엄마다. 정희의 60년은 어땠을까. 정희의 어린 시절을 묻는다. 유독 엄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정희는 7남매 중 넷째지만 막둥이처럼 애교가 많다. 엄마에게 졸라 산 핑크색 원피스와 빨간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단다. 어렸을 적 정희네는 잘 살았다. 치매 걸린 할머니가 집문서를 홀라당 태워버리기 전까지는. 그다음 이야기는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며 갓난쟁이 2명을 키우고 돈까지 벌어야 했던 그 시절 어머니의 삶이다. 정희의 삶은 어디에 있을까. 이쯤 되니 살아가는 모든 것이 경이롭다. 다들 이렇게 삶을 붙들고 있는 거라고? 두발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 박수갈채를 받아야 할 판이다.


회사생활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으니 짝꿍이 본 드라마를 이야기해 준다. 이 회사의 주 업무는 동그라미를 끊기지 않게 이어 그리기다. 주인공은 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끊기지 않게 동그라미를 그리다 잉크가 다해 어쩔 수 없이 펜을 바꿔 이어 그린다. 동그라미를 완성해 상사에게 보고하고 상사는 커다란 돋보기를 꺼내 선 하나하나를 살핀다. 펜을 바꿔 다시 그린 부분을 발견해 노발대발하며 종이를 주인공 얼굴에 던진다. ‘이거 하나 제대로 못해? 동그라미 그리는 게 그렇게 어려워? 너 그럼 월급은 뭐 하러 받냐?‘ 이 모습을 본 사수가 주인공을 비상계단으로 부른다. 우리는 그냥 시키는 일만 하면 돼. 띠링. 월급이 입금 됐다는 문자 알림이다. 문자를 보고 사수가 씩 웃는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문자를 확인한 그녀도 웃는다. 이거 봐 우리는 돈이라도 많이 받잖아. 아무런 생각 말고 시키는 대로 해. 휴. 내 이야기잖아!


과거의 내가 바라던 모습은 지금의 나일까.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등교하던 정희는 장손도 아닌 셋째 며느리가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와 설날, 추석 차례 모두 독박 쓸 걸 알고 있었을까. 미래에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 동그라미나 그리고 있냐고 타박할까. 어찌어찌 잘 버티고 있다고 토닥여줄까. 정희는 내가 갈 때마다 활짝 웃으며 반겨준다. 그 미소엔 지난날의 힘듦은 온 데 간데없다. 며느리, 엄마로서의 삶도 정희의 시간이겠지. 수많은 동그라미도 내 시간일 수 있나. 오늘도 동그라미를 그리러 지하철에 몸을 구긴다.



[요마카세] 월요일 : (흑)역사 모음집

작가 : 흐름

소개 : 현재에 살자 집착하는 사람. 문득 지금의 나를 만든건 과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꽂힌다. 과거의 내가 미래를 만든다면, 과거는 미래요 미래는 과거가 아닌가. 흑역사가 미래가 될 순 없어 써내려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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