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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나는 미괄식 같은 사람이에요

by 흐름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나는 감정에 무딘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독 ‘내’ 감정에 무딘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표정, 말투, 분위기와 같은 감정의 뉘앙스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래서 인사 후에 상대방의 반응이 평소와 다르다 느껴지면 두세 마디 더 건넬 말들을 꿀, 꺽. 하고 삼킨다. 나는 말 한마디로 누군가의 기분을 전환시킬 만큼 유쾌하거나 유머러스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구태여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 그만의 사정을 ‘무슨 일 있어?’라는 한 마디로 헤집고 싶지 않기 때문에. 먹구름이 잔뜩 낀 어떤 마음은 그 다정한 물음에 답할 만큼 마냥 가볍진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마음의 준비도, 말할 수 있는 상태로 되기까지의 시간도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타인을 향한 감정 센서를 측정한다면 10점 만점에 7-8점은 되는 듯하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감정 센서는 2점 수준에 불과하다.


계약직으로 재직했던 회사에서 입사 시기가 비슷했던 언니가 있었다. 불과 2주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우리 둘은 스스로 입사동기로 묶어 여겼다. 타인한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나라서, 그럴 리 없는데 언니의 입사 당일 너무 환하게 웃어줬던 모습에 내 첫인상이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같이 농촌봉사활동을 가서 잡초를 뽑으며 교회 다닌다는 교밍아웃(?)에 얘랑 친해질 수 있겠다고 자기 혼자 확신을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단순한 언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사랑스러운 솔직함이 언니의 매력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의 존재 덕분에 혹독한 사회초년생의 시기를 꿋꿋하게 견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퇴사 2개월을 앞둔 시점. 언니가 다른 회사에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고 왔다. 우리는 끝의 정함이 있는 계약직 신분이었기에 정규직으로의 신분상승(?)을 위해 취업시장의 문을 두드려왔던 터라 언니의 최종합격 소식이 어느 때보다도 기뻤다. 그렇게 언니는 이직을 했고, 언니의 빈자리를 느끼며 남은 2개월을 마저 채웠다.


그런데 그 2개월 동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처음에는 단짝 친구처럼 지내던 언니가 없으니까 당연히 찾아오는 공허함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빈자리는 무색했다. 도보 10분 거리에 사는 동네 친구이며 주말마다 교회에서 만나는 교회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언니의 빈자리로만 설명될 수 없는 감정이었고, 결코 유쾌하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찜찜하게 변질되었다. 퇴사 후 어느 날 오랜만에 평일에 만나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고, 언니 회사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언니는 야근을 하게 됐고, 근처 카페에서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던 난 아쉬운 마음 만들고 돌아왔다. 하, 그런데 마음의 무게가 아쉬움이라기엔 너무 무거웠다. 불편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낯설었다. 그 불편함이. 형체가 불분명한 이유로 불편해하는 그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난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불편함의 본체를 찾아 헤맸고, 끝내 발견한 감정의 정체는 굉장히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언니의 이직이 그 시작이었다. 언니와 달리 나는 정규직의 문턱에 오르지 못했다는 현실. 거기서 오는 실망감. 노력했지만 얻어내지 못했다는 실패감. 미래에 대한 막연함, 그리고 언니를 향한 부러움 같은 감정 파도들이 나 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깊은 곳에서 너울너울 대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와 함께 저녁 먹지 못한 그날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지만 다르게 가고 있는, 어느 갈림길부터는 갈라져서 멀어지고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물살이 하나 더 생겨버린 것이었다. 그런 감정의 실체를 마주하고 쏟아지는 화살에 마음이 꽤나 아파왔다. 그럼 난 진심으로 언니를 축하하지 않은 건가? 언니의 잘됨을 질투한 건가? 그 축하는 가식이었나?. 찰나에 나를 의심했고 경멸했다. 못나 보였다.


이후에 그대로 감정들을 외면하자니 언니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큰맘 먹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언니가 어떻게 반응할까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니는 언니만의 단순함과 유쾌함으로 야! 안 그런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당연한 거지! 난 진짜 네가 괜찮은 줄만 알았어. 그게 더 이상했다고! 하며 못난 나를, 스스로도 못나게 여겼던 나를, 의심했던 나를, 경멸했던 나를 이해해 주었고 받아주었다.


난 네가 이래서 좋았어! 난 네가 이래서 우리가 친해질 줄 알았다?라고 말했던 언니는 두괄식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의 관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네가 좋다고 말해버리는. 때로는 이때는 좀 서운했다고 얘기해 주는 솔직함 마저 스피드 한 사람. 반면 나는 미괄식 같은 사람이다


언니의 이직부터 불편한 감정의 실체를 마주하고 솔직하게 털어놓기까지 3-4개월이 걸렸다. 그렇다. 나란 사람은 감정에 무디고 무딘 돌 같은 사람이고, 감정의 실체를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느린 거북이 같다. 사람은 좋아하지만, 상처받기 싫어 마음을 잘 내주지 않는 방패 같은 사람이며, 좋아하는 감정조차도 순간적이거나 충동적인 건 아닐까, 진짜 좋아하는 게 맞을까 두드려보고 또 두드려보고 건너고야 마는 돌다리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느리다. 아주 많이 느리다. 감정에 쉽게 확신하지 못하며, 그래서 표현도 서툴다. 이 글을 빌어 혹시라도 나를 답답해하거나 속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내가 애정하는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나는 생각보다 많이 느려요. 미괄식 같은 사람이에요. 느려도 기다려 줄래요?’


작품명: 절찬리 기록 중

작가명: 세렌디피티

소개: 쓰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 잡히다가, 이제는 쓰고자 하는 마음을 붙잡아 놓질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버렸습니다. 무엇이든, 어찌 됐든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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