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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무탈해서 고마워

by 흐름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슬며시 다가왔다 슬그머니 멀어지는 날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지만 감동, 감격, 사랑 같은 것들로 존재의 의미가 부여됐던 것처럼 숱한 의미 없이 지나갈 수 있는 평범한 날들 중 하나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축하와 애틋한 마음들로 특별하게 색칠되는 날, 생일이다.

어릴 적엔 전날부터 밤새 폴폴 끓인 엄마의 미역국 냄새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고소하고 진한 국물은 엄마의 따뜻한 사랑이었고, 생일이란 하루의 시작은 기대와 설렘, 웃음과 행복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생일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삶은 익숙해졌고, 고시원과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 미역국은 고사하고 밥 한 끼 잘 챙겨 먹으면 다행이었다. 10년 넘게 자취를 하고 있지만 좀처럼 요리와 친해지지 못한 내가 재료를 사서 미역국을 끓여 먹을 일은 만무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생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설렘과 기대를 가졌던 시절도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래- 처음부터 무감각했던 것 아니었겠지. 그런데 생일은 언젠가부터 어색해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의미를 부여한 만큼 공허함도 커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탓일지도 모른다.

장을 보고, 재료를 볶고 끓이고, 고슬고슬 갓 지은 밥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따끈따끈한 미역국. 거기에 곁들여진 엄마의 반찬까지. 상상만 해도 그리운 맛과 풍경. 하지만 혼자 먹는 생일 밥상은 그리움보다, 따뜻함보다 외로움이 먼저 밀려온다. 곱게 차린 밥상 앞에 있는 나를 감싸는 건 적막뿐일 테니까. 생의 시작에 감격하고 환대하던 가족들의 감격과 사랑은 전화 너머로만 전해지니까. 하루 틈틈이 전해진 축하 메시지는 너무나도 고맙지만 역시나 핸드폰에만 머무는 흔적들이니까. 그렇게 외로움은 무의식에서 생일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생일? 그냥 수많은 날들 중 하루일 뿐이야. 상처받을 일 만들지 마’라는 속삭임과 함께.

올해도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다. 아니다. 오히려 겁이 났다. 지난 몇 년간의 생일은 모함, 권고사직, 미움과 원망 같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로 잔뜩 엉켜 골치 아픈 실뭉치가 되어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생각지 못한 우울한 기색의 실타래가 엉킬까 두려웠다. 딱히 기념도 하지 않고, 의미도 두지 않았건만 생일은 징크스가 되어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애석하기 짝이 없다.

생일은 그런 나를 안쓰럽게 여긴 걸까. 다행히도 조용히, 무사히 지나갔다. 자정이 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무탈하게 흘러간 하루가 이리도 고마울 수 있을까. 균열 없는 하루가 이리도 애틋할 수 있을까. 오늘의 안녕이 이리 안도할 일이란 걸 왜 몰랐을까. ‘안녕하세요’라는 인사 한 마디가 이토록 사려 깊은 인사였는지. ‘무사 무탈한 생일’을 통해 다시 한번 깊게 깨닫는다. 그날 일기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무탈해서 고마워, 무탈한 네가 나에게 준 최고의 생일 선물이야”

그리고 조용히 기도한다. 평범하고 무난한 하루가 되기 힘든 시대에 우리 모두가 무탈하길. 그래서 오늘에 안도할 수 있기를. 내일 서로에게 안녕이라고 따뜻하게 화답할 수 있기를. 생일의 기운을 빌어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안녕을 기도한다.


[요마카세] 화요일: 절찬리 기록중

작가명: 세렌디피티

소개: 쓰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 잡히다가, 이제는 쓰고자 하는 마음을 붙잡아 놓질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버렸습니다. 무엇이든, 어찌됐든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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