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인연의 불시착

by 흐름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터벅터벅, 하강하는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던 중이었다. 근데 갑자기 뒤에서 어깨를 세게 툭- 밀치는 것이 아닌가? ‘뭐지, 이 사람?’ 놀람과 함께 약간의 불편한 심기를 담아 고개를 드니, 내 반응을 찍겠다며 핸드폰을 얼굴 가까이 들이밀고 실실 웃고 있는 너였다. 헤헤 실실 웃고 있는 너의 웃음과 장난끼, 그리고 반가움에 언짢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이 하루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오랜만의 약속, 상암으로 가는 길. “이번 역은 홍대입구, 홍대입구 역입니다.”응? 홍대입구? 핸드폰에 빠져 진작 내려야 할 합정역을 지나쳐 버렸다. 오늘의 바보력이 1+ 상승했다. 급히 길을 다시 찾는다. 홍대입구에서 상암 가는 버스는 많았고, 배차도 짧다. 늦지 않겠구나 다행이다. 바로 오는 버스에 몸을 실어 의자에 몸을 붙인다. 어디서 내려야 하지? 몇 정거장을 더 가야 하지? 오늘의 바보가 더 이상 등장하게 할 수 없다. 그 때, 옆자리에 쿵 와락 앉으며 어깨를 밀친다. ‘뭐지?’고개를 돌리자, 또 너다. 또 헤헤 실실 그 웃음이다. 나는 또 웃고 만다. 반가워서, 시간이 흘러도 여전한 너의 장꾸력에. 그리고 신기해서, 어떻게 이 버스에서 만나나 싶어서.

두 장면의 주인공은 같은 친구다. 이상하리 만치 자주 마주쳤다. 뒤에서, 옆에서, 때로는 앞에서. 예고 없이 나타나는 이 친구는 내 일상에 조용하듯 기분 좋은 소란을 남긴다. 하루의 온도를 바꿔놓을 만큼. 단순한 우연 같은 순간들을 모아 보니 ‘인연’이라는 단어가 맴돈다.

가끔 난,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다.

“싱어송라이터가 여행하며 노래하는 야외 음악 버라이어티, N년 차 작가님을 모십니다”고민 없이 이력서를 냈고 며칠 후, 면접 자리에서 프로그램 설명을 듣는다. 강진, 단양, 고령의 지역에서 촬영이 진행될 것이며 출연진은 미정. 물 흐르듯 면접은 마무리 됐다.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조심스레 안부를 묻자 익숙한 답변이 돌아온다. 이번엔 함께 하기 어렵겠어요.

시간이 지나 다른 프로그램 제작에 투입되어 일하던 중, 하루 아침에 제작이 중단됐단다. 참 감사하게도 후배 일에 본인 일처럼 마음 써주는 선배 언니 덕에 새로운 팀에 급히 투입되게 된다. 당장 이틀 뒤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라 전화로 먼저 인사를 드렸고,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가수가 출연하는데 우리가 맡은 지역은 강진이에요.

설명을 들을수록 기시감이 강하게 몰려왔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묻는다.

“사무실 위치는 어디일까요?” “등촌동이에요”

맞다. 반 년 전 면접 보러 갔던 그곳. 그 흔한 상암이 아니었기에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출근 첫 날, 낯익은 건물과 현관. 확신은 현실이 되었다. 반 년 사이 어떤 이유에서 팀은 바뀌었고 새로 꾸려진 작가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 했던가.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하고.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게 인생이라 했던가. 그 날의 실패와 아쉬움이 돌고 돌아 새로운 기회가 새로운 만남으로 찾아오게 될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살아가는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창의적이다. 골목 끝자락에서 만난 것이 실패인 줄 알았다. 그런데 모서리가 있었고 새로운 길이 펼쳐져 뜻밖의 공간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만난 팀은 가장 정신 없이 흘러간 현장 중 하나였고, 올해만큼이나 녹아 내릴 듯한 땡볕 더위 아래 며칠씩 촬영했음에도 고단함보다는 즐거움의 잔향이 더 강하게 남아있다. 그 현장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좋은 선후배와 동료들. 의심은 없었다. 반 년 전의 불합격은 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작은 우회로였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상하게도 만남과 인연은 불시착처럼 내려 앉는다. 예상 못 한 만남들이 모여 한 페이지의 문장들이 되어주고, 계획했던 것 이상으로 더 수려하고 아름답게 쓰인다.

우연이 스쳐가며 남긴 미세한 방향의 차이, 1-2분이 만든 아주 작은 시간의 기울기. 그 끝에서 우리는 서로를 만나고 발견하며 마음을 나눈다.


[요마카세] 화요일: 절찬리 기록중

작가명: 세렌디피티

소개: 쓰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 잡히다가, 이제는 쓰고자 하는 마음을 붙잡아 놓질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버렸습니다. 무엇이든, 어찌됐든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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