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라크네에서 컴퓨터까지

-전시 <짜고 치는 여성들> 리뷰

by 흐름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전시 왜 봐?]가 시즌 2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글을 또 써볼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는데, 역시 전시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즌 2는 본격 전시 리뷰를 써 보기로 했습니다. 아닐 수도 있지만, 가능한 지금 바로 보러갈 수 있는 전시에 대한 리뷰를 써 보려고 합니다.


사실 인풋 대비 아웃풋이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전시를 하나만 다루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본 전시와 관련해서 함께 생각할 만한 주제를 폭넓게 다루고자,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다른 전시, 책, 영화 등을 함께 연결지어 보려고 합니다. 시즌 1이 ‘전시를 보는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시즌 2는 ‘내가 보는 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시 이야기인 만큼 썰풀이를 하듯 구어체를 듬뿍 담아 편하게 써 보려고 합니다. 한번 옆길로 새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사고가 튀어버리는 MBTI N(직관형) 90%의 필자의 사고 방식을 따라가므로, 딴소리 신나게 하다가 힘이 빠져 막상 주제가 된 전시 이야기의 비중이 축소시켜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2025 프로젝트 이마고 기획전 <짜고 치는 여성들>

시즌 2의 첫 리뷰는 <짜고 치는 여성들> 입니다. 학고재 아트센터에서 2025년 10월 15일부터 25일까지 열립니다. 사실 전시에 참여하는 4명의 작가분들 중 저의 교수님이셨던 서효정 작가님을 향한 편애와 존경심을 담아 정해 보았습니다. 초기작부터 꾸준히, 모든 행보를 지켜보며 응원할 수 있는 작가님이 계시다는 건 정말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탁월한 전시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용어구에 기대 직관적이면서도, 톤 앤 매너와 메시지를 잘 담아내면서도, 깊이도 있으면서, 여러모로 너무나 적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짜고 치는 여성들>은 ‘직조’, ‘타자’, ‘코딩’을 통해 창작을 하는 4인의 여성 작가를 조명합니다. 수공예적 흔적과 신체를 적극적으로 연결하는 이현화 작가, 직접 손으로 ‘프로그래밍’한 도안을 직조하고 풀어내는 차승언 작가, 해녀로 일하며 얻은 경험을 재해석한 김들림 작가, 정확한 언어로 짜여진 코드 안에서 의도를 넘어서는 우연을 발견하는 서효정 작가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직조와 타자, 코딩은 서로 다른 시대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반복’과 ‘규칙’이라는 핵심적인 특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가사노동’이라는 형태로 일상과 너무나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시대와 문화를 불문하고 언제나 평가절하되었던 여성의 노동은 비로소 창조적 반복이라는 키워드로 재해석됩니다.


텍스트text는 사실 텍스타일textile이다

본격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왜 기록이 직조와 연결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부러 하고 싶습니다. 언어를 재료로 만든 텍스트(text)와, 씨실과 날실을 엮어 만든 텍스타일(textile)은 모두 텍스투스(textus)라는 라틴어를 어원으로 가집니다. 이 단어는 ‘짜다’, ‘엮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단어의 지칭 대상과 언어 자체의 연결이 필연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정도의 유사성이라면 꽤나 의심할 만하죠.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텍스트는 복수 문장의 집합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아주 복잡한 요소들이 리듬과 반복을 통해 서로 얽혀 있는 무언가라고 다시 읽어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텍스트와 직물의 관계는 이쪽 세계(?)에서는 제법 흔하고 보편적인 비유로 활용됩니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였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이 비유를 유의미하게 다루었던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바르트는 텍스트를 ‘인용의 직물(a tissue of quotations)’로 설명하며, 텍스트가 얼마나 많은 문화와 관념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한 듯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말과 문장에는 사실, 메일의 숨은참조 목록처럼, 이전까지 쌓여 온 수많은 맥락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텍스트를 창작하는 작가는 직물을 엮는 직공(weaver)이 됩니다. 직공은 직물(textile)을 짜는 사람이니, 이 논리 안에서라면 텍스트=텍스타일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직물’을 메타포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단순히 ‘꾸준한 반복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직물이 아니라, 벽돌로 쌓은 벽일수도, 물을 퍼올려 땅을 만드는 것일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직물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성기다’라는 것입니다. 벽과는 달리 직물은 물에 젖기도 하고 바람을 통하게도 합니다. 완고한 물질이 아닌 직물은 쉽게 해체되거나 재조립됩니다. 실은 빠질 수도, 다시 얽힐 수도 있는, 아주 얇고 유연하고 부드러운 물질이니까요. 따라서 텍스트는 언어와 맥락을 공유하는 자라면 모두가 관여할 수 있는 아주 성긴 물질이 됩니다.

(그렇게 머릿속에 조심스레 떠오르는 어떠한 게임의 이름..(관련 없음 주의) 어쨌든 MMORPG야말로 정말 능동적인 스토리텔링을 해낼 수 있는 장르이니까요(?))

여기서 데리다는 바르트의 관점을 보다 더 ‘해체’하고 전복시킵니다. 데리다는 바르트가 텍스트를 ‘인용의 직물’로 설명했던 것보다 더 나아가, 언어가 가진 ‘고정된’ 의미 혹은 상징을 유예하고 텍스트의 완결성을 부정합니다. 아주 납작하게 말하자면, 텍스트는 계속해서 다른 의미와 새로이 연결되거나 기존의 의미와는 끊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므로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성의 가능성을 배제하면 텍스트-텍스타일은 더 자율적인 것이 됩니다. 언어 뿐만이 아닌, 시간과 소리가 개입될 가능성마저 개방되는 것이죠. 이제 텍스타일은 감상자에게 하나의 생명체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작가는 텍스트의 운명을 완전히 결정짓지 못합니다. 저자는 ‘죽음’을 맞이했으므로, 그럴 지위는 박탈당한 지 오래입니다. 텍스트는 성기고 유연하기에 고정된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텍스트 안에는 언어와 문화, 우리가 사는 세상 뿐만 아니라, 시간이나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담아내는 신체까지도 포함하여 엮여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텍스트를 수용하는 독자는 또다른 직공이 되어 텍스트를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텍스트-텍스타일 메타포는 독자에게 훨씬 더 넓은 참여의 기회를 부여하고 능동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긍정합니다.


이쯤 되니 언어라는 것을 인류가 취득한 이상, ‘짜는’ 행위는 본능처럼 느껴집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대한 열망이 선험적이기에 우리는 창작을 유희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에서 찍었던 권은비 작가의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라는 작품 일부 사진. 재난과 저항의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그들의 경험을 직조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이 작품이 떠오르네요..)


‘짜는’ 여성, 아라크네

그러면 이제 다시 ‘짜기’에 집중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전시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짜는 여성’, 아라크네입니다. 일찍이 인간에게 베짜기를 가르쳐 준 여신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던 맹랑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 아라크네는 베짜기의 명수로 널리 소문이 나 있었고, 결국 아테나 여신에게 도전하기에 이릅니다. 의외로 아라크네는 아테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제법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고 전해집니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아라크네가 오히려 실력으로는 이겼다는 의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신화 속 이야기인 만큼 오만한 인간은 결국 부끄러움에 죽음을 택하고, 신은 거미로 그를 부활시키는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끝납니다. 자신이 향유하는 예술 영역을 만든 창작자의 가족친지들을 욕보이는 작품을 만들었으니, 아무리 지혜와 정의의 여신이라고 하더라도 꽤나 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죠.

(출처 :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4권, 토머스 불핀치 지음, 홍은영 그림)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아라크네는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와 순수 실력만으로 맞붙은 몇 안 되는 뛰어난 인간 중 한 명입니다. (어떠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화려한 눈동자 모양이나 대단한 혈통같은 것 없이도 신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에 성공한 것입니다. 아라크네가 디스의 수위를 조금만 낮추었더라도, 적당히 오래 살아남아 그녀의 작품 중 일부가 후대에 전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랬다면 전설이 되지는 못했겠죠.)


조금 더 들여다보자면, 이미 이 시절에도 태피스트리는 하나의 예술로 평가받았으며, 이것이 생활용품을 만들기 위한 공예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서의 위치를 점하였음을 의미하는 설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라크네를 ‘노동하는 여성’의 대유로 본다면, 여성의 노동(과 그 결과물)이 비록 신의 경지에 다다르는 수준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평가절하되는 저주를 받았다는 은유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거미는 평생 실을 짓고 짜지만 그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생존의 문제이기에, 그 자체로서 예술성이 있는 행위라고 인정받으려면 꽤 오랜 설득을 거쳐야만 할 테니까요. 여성의 노동으로서의 자수 예술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위계 전복과 기록의 수단으로서의 자수 - 홍영인 작가

여성의 노동이 평가절하되는 것, 이 아주 오래되고 보편적인 문제를 오랜 시간 탐구한 작가가 있습니다. 2019년 MMCA 올해의 작가상 4인 중 한 명이었던 홍영인 작가는 자수와 태피스트리 작업을 통해 표현 수단을 ‘여성적’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산업화를 경험한 국가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여공의 저임금 노동인 바느질(미싱)과 순수예술에서 배제되었던 ‘자수 공예’의 방식으로, 침묵된 목소리를 물리적으로 시각화합니다.

(출처 : 홍영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2025)>, 아트선재센터에서 직접 찍은 사진.)


홍영인 작가는 현대 사회 안에서 침묵당했던 존재(여성, 동물 등)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것에 집중해 왔습니다. 가장 최근작인 <다섯 극과 모놀로그(2025)>에서는 거대한 태피스트리에 퍼포먼스를 덧붙입니다. 현대사 안에서 너무나 쉽게 침묵당하고 망각된 여성들의 목소리는 태피스트리 위에 다시 쌓이고, 소리와 몸짓을 입고 시간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획득하며 부활합니다.


몸과 시간을 엮는 행위로서의 직조

이제 텍스트-텍스타일에 대한 능동적 참여나 ‘짜고 치는’ 행위의 여성성 등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합의가 충분히 된 것 같으니 이제는 전시 안으로 더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전시에서 소개된 네 명의 작가는 제각기 다른 방식의 표현 언어를 가지지만 ‘반복’과 ‘규칙’이라는 동일한 원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 반복과 규칙은 여성의 손끝에서 노동의 형태로 발현되고요. 이 전시는 그 결과물 뿐만 아니라, 그 과정과 과정을 담아낸 신체까지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차승언 작가 작품, 직접 촬영)

차승언 작가의 작품은 시간순으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패턴을 구현하기 위한 규칙이 시각화된 도면이 놓이고, 순서대로 그 도면을 물리적인 실체로 만들어 낼 실과, 그 실이 엮여 만들어진 ‘의도된’ 패턴이 있습니다. 철제 프레임 위에 직물을 덧씌우면 흘러내리거나 구부러지며 자연스럽게 왜곡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왜곡은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를 우연히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됩니다. 왜곡이 해소되며 다시 본연의 패턴으로 돌아가고, 짜고-푸는 행위는 계속해서 반복되며 실은 엮이거나 흩어집니다. 완결되지 않는 텍스트가 끊임없이 순환하며 이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현화 작가 작품, 직접 촬영)


이현화 작가의 작품은 이번 전시를 통해 만난 작품들 중 가장 ‘신체’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신체 그 자체라기보다는, 신체 혹은 움직임의 흔적이 매우 명확하게 가시화되었달까요. 이 작품 역시 먹으로 드로잉을 한 후 그 드로잉을 그대로, 아주 노동집약적이고 섬세한 방식으로 섬유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드로잉이란 찰나와 우연의 미학을 담아내는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시간성이 더해지니 완전히 새로운 물성을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출처 : 가나아트센터 - 투병의 경험을 섬유 재질의 대형 설치 작품으로 풀어낸 시오타 치하루의 작품과 연관지어보고 싶었습니다.)


김들림 작가 역시 작품에 신체를 담아냅니다. 다만, 신체의 궤적이나 움직임보다는, 그 신체가 살아가는 배경인 ‘삶’ 그 자체를 재료로 사용합니다. 김들림 작가는 제주에서 해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해녀로서의 삶은 그녀가 작품을 창작하는 계기이자 주제가 됩니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바다와 맞닿은 채 살아가는 해녀의 삶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보통의 우리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모를 것입니다. 김들림 작가는 관찰이 아니라 완전한 경험 안에서 일상의 부분을 발췌해 화이트큐브 안으로 소환합니다. 의미 내적으로 실제와 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느꼈습니다. 당장이라도 짠 바닷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작품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그들의 노동을 ‘비효율적’이라고 단정짓는 것이 얼마나 범박한 생각인지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자세히 보면 직물 위에 프로젝트로 쏜 여성의 뒷모습 형상이 보입니다. - 김들림 작가 작품, 직접 촬영)
(김들림 작가 작품, 직접 촬영 - 닻인듯 생명줄인듯 부표인듯 모호하지만, 생명과 이어진 숨결이라는 감각이 전달되는 것만은 유효한 것 같네요.)


정확하게 의도된 우연성

약간의 방점을 찍어 서효정 작가의 작품 이야기를 하고 싶어 굳이 단락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작업은 서효정 작가의 <Weaving Codes>입니다. 작가가 팬데믹 시절부터 이어져 온 매일의 수행적인 코딩 기록이 남긴 패턴은 벽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코딩은 컴퓨터와 함께 일하는 것인지라, 매우 정확한 언어로 짜고 쳐야만 합니다.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줄 아는 인간의 고맥락 언어능력과는 달리, 컴퓨터의 언어는 지극히 저맥락적입니다. 가장 적절한 단어만을 골라 논리적으로 말할 줄 알아야 하며,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하는 곳에 반드시 있어야만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따라서 컴퓨터로 무언가를 만들고 구상하는 일은 매우 계획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의도에 맞게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만 완성에 다다를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패턴이 보이도록 의도하여 코드를 짜더라도, 열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는 또다른 패턴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한두 가지의 알고리즘에 의존하여 리듬과 반복에 대한 규칙만을 제공하면, 생성된 요소들이 또다시 서로 인터랙션하며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인간이 도덕과 규칙을 만들어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공존하기 위한 거리와 규칙만 정해둔 뒤, 그 안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서효정 작가의 컴퓨테이션 패턴 작업은 지극히 ‘인간적’인 움직임처럼 보입니다. 우연성은 끊임없이 발생하지만, 사실 그 우연성은 아주 정확하고 엄밀한 언어 안에서 짜여진 것이라는 점이 정말 매력적입니다.


(서효정 작가 작품, 직접 촬영)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매력적인 지점은 바로 ‘펜 플로터’를 활용해, 컴퓨터로 만든 패턴을 아날로그적인 도구를 활용해 실체화하는 기계를 적극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패턴을 벡터 파일로 내보내기하여 디지털 프린트를 해도 되는 것일테지만, 작가는 성실하게 본인이 이어 온 패턴 만들기 작업을 또다시 기계의 방식으로 ‘수행’하는 방향을 선택합니다.


디지털과 달리 아날로그는 빈틈이 많습니다. 즉, 텍스타일의 조직 사이사이에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풍부합니다. 전자책에는 없는 종이의 촉감과 냄새가, 디지털 프린트에는 없는 잉크 특유의 무늬와 질감이 아날로그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죠. 효율성의 측면에서 이러한 감각은 사실 불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콘텐츠를 전달한다’는 의도와는 약간 어긋나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니까요. 바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러한 ‘불필요한 감각’을 도려내며 모든 경험을 관통하는 골목을 파내어 넓고 반듯하기만 한 도로로 바꾸어 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작가는 빈틈 없이 짜맞춘 공간 안에서의 대화를 통해 패턴을 일구어 냅니다. 그 노련한 수행은 다시금 반복과 규칙으로 물리적인 세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변화의 대척점으로 향하는 듯 보입니다. 이러한 고집스럽고 아름다운 수고는, 우리의 사상사가 왜 텍스트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개방하는 방향을 향했는지 다시금 되물으며 창조가 일상에 가져오는 가치 위에 다시 한 번 방점을 찍는 것만 같습니다.


(서효정 작가 작품, 직접 촬영)

펜과 지면의 마찰로 인해 필연적으로 아주 조금씩의 오차를 발생시키는 펜 플로터의 반복적 수행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계와 인간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잠시나마 망각하게 됩니다.


여성들에게 기계는 새로운 영토였다

네 작가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여성적 노동’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의문이 생깁니다. 왜 ‘기계’의 방식을 이 전시에서는 오히려 여성친화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을까요? 단순히 반복과 규칙만으로 ‘코딩’을 ‘직조’와 연결짓는 것은 어쩌면 성급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단편적으로 생각해보면 더욱 헷갈려집니다. 기계를 다루는 직군, 그러니까 IT업계나 개발, 혹은 전자기기와 관련한 산업 종사자의 남성 비율이 훨씬 높다는 것은 산업화가 이루어진 국가에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모두가 끄덕일 수 있는 보편적인 상식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수 배출하는 일반적인 대학의 ‘컴공과’를 떠올려 보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고요.


기계의 여성친화성에 대해 이해하려면, 컴퓨터라는 것이 처음으로 생겼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계산과 알고리즘에 따른 반복 작업을 돕기 위해, 세상에는 처음으로 ‘컴퓨터’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이 계산 기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완전히 새파란,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죠. 신문물에 밝은 사람들은 이 새로운 기계장치의 가능성을 폭넓게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생성형 AI가 처음 등장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어 각자만의 실험에 몰입한 것처럼요.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 출처 : 왓챠피디아)


계산 기계가 가장 빨리 스며들기 시작한 영역 중 하나는 의외로 음악이었습니다. 기계 장치에 아주 조금의 아날로그적인 조정이 가미되면 이전의 세상에는 없던 완전히 새로운 소리를 무한히 생성해낼 수 있었거든요.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전자음악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활동하던 여성 전자음악 아티스트의 궤적을 여러 세대를 거치며 그 계보를 훑어갑니다.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을 다닌 경험이 있다면 반드시 거쳐갔을 악보집의 제목을 한번 떠올려 봅시다. 하농, 소나티네, 바이엘, 모차르트, 베토벤, ••• 대부분 누군가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음악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면 그 사람들은 전부 유럽에 위치한 어느 국가의 남성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됩니다. 더 자세히 또 정확히 말하자면 ‘유럽 출신의 백인 남성’ 집단이 쌓아 올린 세계가, 우리가 당연한 듯 받아들였던 ‘음악의 역사’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본디 연주와 작곡이란 전통적인 자본과 재화를 지닌 집단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악기가 아닌 기계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전자음악은 존재 자체가 이미 기존 체계에 대한 전복이자 혁명이었습니다. 기계장치만 있으면, 그리고 적당한 기교로 변주를 주는 방법만 안다면 아무런 자본 없이도 마음껏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전자음악’이라는 새로운 장르는 비옥한 빈 땅과 같아 앞서 존재하는 그 어떤 제약도 규칙도 없었습니다. 자본과 권력을 소유하지 못해 아카데미 체계에 속하지 못했지만 재능은 넘쳐났던 수많은 여성 음악가들은 기계와 대화하며 새로운 세계에서 자유로이 창작할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짜고 치며 과거와 조우하는 현재

<짜고 치는 여성들>은 여성의 손끝에 의탁하여 전수되어 온 수많은 미시적인 노동과 창조의 가치를 재조명합니다. 베틀, 바늘, 텍스타일, 종이, 기계장치, 디지털 스크린. 기술 중심,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서도 영토를 달리하며 끊임 없이 계보를 이어 온 여성들의 노동과 창작의 과정은, 텍스트-텍스타일로서 비로소 언어의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계보를 훑는 일은 본질을 따지는 것과 달리 발생한 사건끼리의 우연적인 연관성과 현재성에 집중하는 탐구 방식입니다. <짜고 치는 여성들> 전시에서도 그러한 태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네 명의 작가를 동시대 여성들에 대한 대유로 보아 이 작품에서 어떠한 시대정신을 이끌어내려는 과도한 시도가 없어 좋았습니다. 그들이 짜고 치며 자아낸 텍스트를 온전히 감각해내려는 노력의 일환처럼 보였습니다. 그저 각자의 삶에서 주워 온 언어과 감각을 신체에 엮는 과정에서 발생하거나 소멸하는 의미를 계속해서 포착해내겠다는 것이죠. 앞서 말했듯, 그녀들이 짜고 치며 만들어내는 텍스트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으며 생동하는 존재이니까요. 과연, 아주 저항적이며 영민하고 여성적인 관점이로군요.


이 다큐멘터리의 OST로 삽입된 The Space Lady의 ‘Synthesize Me’를 공유하며 글을 닫습니다. 제법 중독성이 강한 곡인 만큼, 큰 시험 등 중요한 이벤트를 앞둔 분들은 청취에 유의하세요.



[요마카세] 토요일 : 전시 왜 봐?

작가 : GARDEN

소개 : 주말마다(사실 평일에도..) 전시를 보러 다니는 직장인의 전시 보는 이야기입니다. ‘전시 왜 봐?’ 라는 질문에 짧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상상해도, 무엇이 펼쳐져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들을 글로 풀어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금요일] 환상의 섬, 이비자(Ibiz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