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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택주 Dec 05. 2020

오늘, 살림하기 딱 좋은 날

죽음에 맞서는 게 삶이듯이, 죽임에 맞서는 게 '살림'이야!

살림살이, 모르는 게 더 많아

이리 얽히고 저리 설킨 살림살이는 그대로 복잡계


벼리, 안녕?     


아침놀이란 아이가 있어. 이름이 곱지? 얘는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아이와 씨름을 해서 이기고, 가장 빨리 달리는 아이와 나란히 달릴 만큼 달음박질도 잘해. 그뿐인 줄 알아? 똥만 보고도 어떤 짐승이 누운 똥인 줄 알고 발자국만 보아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대. 

아침놀은 창이나 활을 들고 모두 숲으로 가서 짐승을 쫓는 마을 아이들과는 달리 마음이 여린 아침놀은 짐승을 잡기보다 다친 짐승을 돌보는 걸 훨씬 좋아했어. 

짐승 잡기보다 다친 짐승을 돌보는 게 훨씬 좋아 / 빛그림- 휴먼어린이


아빠는 그러는 아침놀더러 “누구보다 빠르고 용감하며, 똥만 봐도 누구 똥인 줄 알고, 발자국만 봐도 어디로 갔는지 알 만큼 머리가 좋은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죽어라 하고 사냥을 안 하려고 드는 걸!” 하며 호통을 쳤어. 무슨 얘기냐고? 제목도 빼먹고 책 이야기를 꺼냈네. 고무신 할배 윤구병 선생님이 지은 <모르는 게 더 많아>에 나오는 이야기야.        


❏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내는 힘

이토록 혼쭐이 나고 나선 사냥길, 결이 바뀌었으려나? 아냐! 노루를 보고는 “네 눈이 그렇게 착하고 예쁜데 내가 어떻게 너를 죽일 수 있겠니?”하고 창과 활을 내던져. 토끼를 보고도 깜찍하니 데리고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덫에 치여 있는 늑대 새끼를 보고는 올무를 풀고 약풀을 뜯어다가 발목에 감아주고 놓아줘.     


그러는 사이 날이 캄캄해졌어. 날이 어두워도 집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어. 또 빈손으로 들어갔다가는 아빠에게 또 혼이 날 게 뻔했으니까. 숲속에서 서성이는데 어디선가 앓는 소리가 들려. 한마을에 사는 날쌘범이라는 아이가 제가 잡은 멧돼지 새끼 옆에서 배를 움켜잡고 데굴데굴 굴러. 온몸을 칼로 찌르는 듯이 아프다면서. 독이 있는 열매를 먹었다는 걸 알아차린 아침놀은 “널 도울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해. 그러나 걔는 “사냥도 못 하면서 어떻게 돕겠다는 거야.”하고 콧방귀 뀌지. 아침놀은 “난 그 독을 없애는 풀이 어디에서 자라는지 알아. 조금만 참고 기다려.”하고는 날래게 약풀을 뜯어다가 날쌘범 입에 넣어줘.     


이 약풀로 너를 살릴 수 있어 / 빛그림- 휴먼어린이

  

이튿날 아침 말짱해져서 마을로 돌아온 날쌘범은 아침놀 덕분에 살아났다며 “얘는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내는 힘이 있어.”하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어.    



이걸 보면서 영화 <핵소 고지>가 떠올랐어.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악명 높은 고지 ‘핵소 고지’ 전투에서 깊은 상처를 입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미군 부상병 일흔다섯 사람을 살린 위생병 이야기야. 홀로 10여 시간 동안 목숨을 건 몸부림 끝에 살려낸 감동 어린 실화지.     


❏ 살려내고야 말겠어!

1차 세계대전 참전군인 아들로 태어난 데스먼드. 간호사인 애인 도로시가 준 의학서적을 읽으며 ‘사람을 살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는 “위생병으로 참전해 사람을 살리겠다.”라고 다짐하며 입대해. 그러나 이내 커다란 벽에 부닥쳐. “목숨을 빼앗는 총을 들지 않겠다!”하고 총기훈련을 거부했던 거야. 하루아침에 “겁쟁이”로 몰린 데스먼드는 내려치는 몽둥이와 따돌림 속에서 나날을 보내. 지휘관들은 데스먼드를 군사 법정에 세우며 제대하라고 억누르고. 바로 그때 데스먼드 아버지가 묵은 군복을 꺼내 입고 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장 지휘관이던 머스그로브 장군을 찾아가서 데스먼드를 위생병으로 참전시켜달라고 하소연해.      


가까스로 만난 전장은 팔다리가 찢겨나간 주검과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어. 데스먼드는 빗발치는 총알 사이를 누비면서 팔다리가 잘려 나간 전우들에게 모르핀을 놔주면서 다짐해. “꼭 살려내고야 말겠어!” 하고.     


그러나 급습을 당한 부대는 핵소 고지 아래로 긴급 퇴각 명령을 받아. 데스먼드는 부릅뜨고 죽은 전우 눈을 손으로 감기고서, 물러나는 전우들과는 반대쪽으로 걸어 들어가. 밤이 되자, 일본군 천지가 된 고지에서 상처 입은 전우들을 일본군 눈을 피해 밧줄로 묶은 뒤 오로지 혼자 힘으로 고지 아래로 끌어내려. 

영화 <핵소 고지> 화면 갈무리

“하느님, 부디 제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하고 빌면서.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되는 아픔을 견디며 10여 시간 동안 75명이나 되는 부상병을 살려냈어. 10분에 한 사람꼴로 살려낸 거지. 이토록 옹근 뜻을 가진 이가 지닌 힘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세.   

   

살림살이라는 말 들어봤지. 너무 익숙한 말이라고?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뜻도 찬찬히 헤아려봤니? 죽음에 맞서는 말이 삶이듯이 ‘죽임’에 맞서는 말이 ‘살림’이야. 그러니까 살림살이는 ‘살리는 삶’으로 이보다 거룩한 일은 없어.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사냥하거나 기른 가축을 잡아먹고, 농사를 지어야 살 수 있어. 그렇지 않은 이들은 남이 잡은 짐승이나 남이 지은 농사에 기대어 살아가지. 다른 목숨을 앗는 일도 살림살이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야. 그렇지만 내 목숨을 이어가려고 어쩔 수 없이 다른 목숨을 앗는 것을 벗어난 죽임은 나빠.          

모르는 게 더 많아 / 윤구병 글, 이담 그림 / 휴먼어린이 / 값 12,000원


그런데 그거 아니?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을 때 새끼는 놓아주고 암컷도 되도록 잡지 않아야 하며, 먹을 만큼만 잡아야 다음에 또 사냥할 수 있다는 걸. 


“농부는 굶어 죽을지언정 그 씨앗을 베고 눕는다.”라는 옛말도 있어. 농사짓는 이한테 씨앗은 목숨과 같아서 차라리 굶어 죽을지라도 먹지 않는다는 말이야. 그래야 이듬해에 먹고 살길이 열리니까. 

살림살이에는 다치거나 앓는 사람을 살리는 일도 들어가. 어떻게 아플 때 어떤 풀이 좋을지 또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하는 것이나 어떻게 아플 때 어디를 주물러 줘야 하는지 따위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얼마 전 신문에서 봤는데 곰보배추는 천식에 그만이라더라.      


이처럼 살림살이는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무척 복잡해. 이리 얽히고 저리 설킨 이 세상을 복잡계라고도 하지. 


이런저런 것을 웬만큼 알았다고 여겼는데 수박 겉핥기일 때가 적지 않거든. 그래서 캄캄한 밤에 반짝이는 짐승 눈만 봐도 발자국만 봐도 똥만 봐도 누군지 다 아는 아침놀도 “그래도 모르는 게 더 많아.”라고 말하면서 거듭 알아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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