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변택주 Dec 14. 2020

그들이 아저씨를 속였어요

<병사와 소녀> 전쟁은 죽임, 평화는 살림

벼리, 안녕?     


오늘 연주할 책은 마흔 번째 꼬마평화도서관장인 이금영 선생이 “그림책 치고는 글밥이 좀 많은데…”하며 건넨 <병사와 소녀>야. 책에 담긴 말씀을 새기다 보니 마음이 짠하고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어. 그들은 아저씨를 속였어요.” 하는 말이 아주 여러 번 나와. 뭘 속였다는 걸까?    


폭탄이 터지면서 생긴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병사가 두려움을 억누르며 고개를 조금 들었어. 포연이 걷히며 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얼떨떨해하는 병사 눈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우와 적군 주검이 들어왔어. 살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어. 그때 총소리가 들리고 날아오는 총알이 보였어. 비키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얼굴 바로 앞에서 총알이 멈추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 그 순간 눈앞에 꽃을 든 소녀가 나타나. 누구냐고 묻는 병사에게 “죽음”이라고 하면서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어.      

검은 은빛 주사위같이 생긴 총알이 매우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 병사와 소녀

꽃을 든 소녀가 죽음이라니? 낯설어하는 병사에게 소녀는 “이제 보셨지요. 당신은 속았던 거예요.”라고 하면서 “적이란 사악하고 천박하고 인정도 없이 잔인하고 피에 굶주리고 증오로 가득 차 있다고 그들이 말했지요? 아저씨와는 다르다고 말했지요?” 하고 흔들어. “나는 내 아내와 내 아들, 그리고 내 조국과 자유를 위해서 싸웠어. 내…”라며 말을 잇지 못하는 병사에게 소녀는 그들은 아저씨를 속였다고 했어.      


이 대목에서 영화 <본 얼티메이텀>에서 들은 대사가 떠올랐어. ‘트레드스톤’이라고 비밀요원을 길러내는 기관이 주인공 기억을 지우고 암살 병기로 만들어. 이때 주인공인 제이슨 본에게 질리도록 심어준 것이 “국민을 구하는 게 네 임무다. 모든 걸 다 바쳐서 임무에 헌신해.”라는 말이야. 비밀작전 특수연구팀장 앨버트 허슈 박사는 얼굴을 가린 채 눈앞에 묶여 있는 사람을 무조건 쏴 죽이라고 명령해. 왜 죽여야 하는지 까닭도 알려주지 않은 채.     

국민을 구하는 게 네 임무다!

소녀가 병사를 데리고 간 곳은 사단 사령부였어. 지휘관들이 머리 맞대고 작전을 짜고 있었지. 소녀는 눈을 감으면 어제 회의에서 오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해. 눈 감은 병사 귀에 전세를 결정지을 전투는 다른 곳에서 하고 있으니 이제 이 언덕엔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어. 다른 이가 그건 우리 병사들이 모르는 일이라며 후퇴할 수 없다고 맞받았어. 어떤 이는 칠팔십 퍼센트나 되는 병사가 목숨을 잃을 게 뻔한 데도 이 언덕을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하고. 이 언덕은 이 전쟁만큼이나 보잘것없으니 적과 우리 모두 철수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지. 병사가 전투 직전에 들은 건 저 언덕이 전쟁 흐름을 바꿔놓을 언덕이라는 말이었는데…. 

옥신각신하던 끝에 내린 결정은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남아서 저 언덕에 깃발을 꽂아야 한다는 공격 명령이었어.      


이어서 간 곳은 전장과는 멀리 떨어진 도시에 있는 커다란 건물이었어. 평화 협상을 하는 곳이래. 웅장한 건물 안에 100여 명이나 되는 정치인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어. 국회의사당 안을 떠올리면 쉬이 알아차릴 수 있을까? 모두 번쩍이는 시계를 차고 반지를 끼고 있었지. 번지르르하게 말도 잘하는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구리가 있어야 하니 국경선을 이리 그어야 한다느니 우리는 수은이 있어야 하기에 국경선이 이쪽을 지나야 한다커니 하는 소리로 어수선했어. 이런 얘기로 석 달이 끌어왔다는 소리에 필요하다면 삼 년이라도 할 수 없다고 맞받으며, 저마다 잇속 챙기느라 눈이 뻘건 이 사람들에게 병사들을 비롯해 전쟁으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이들은 안중에 없는 듯했어.     


이걸 보면서 한국전쟁을 멈출 때가 생각났어. 그만 싸우자고 하면서 회담을 이태 넘도록 질질 끌었지. 정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됐어. 넉 달이 넘도록 공산군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해야 한다고 하고, 연합군은 현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고 맞섰어. 밀고 당긴 끝에 같은 해 11월 27일 군사분계선 협상을 마무리 짓고, 비무장지대를 세웠어. 연합군과 공산군이 참으로 전쟁 멈추기를 바랐다면 그때 전쟁을 끝냈어야 해. 그러나 전쟁은 그 뒤로도 아주 오래도록 피를 말리며 이어졌지. 이태 넘게 이어진 회담은 수많은 이들이 죽고 다친 끝에 1953년 7월 27일에야 막을 내렸어.


널리 알려진 무용담 백마고지 전투 이야기도 정전회담이 한창일 때 일어났어. 전쟁 전까지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야트막한 산을 차지하려고 국군과 중공군이 죽자고 싸웠어. 산더미 같은 죽검을 쌓으면서. 1952년 10월 6일부터 열흘 동안 12차례나 벌어진 공방전에서 국군은 22만 발, 중공군은 5만 5,000발이나 되는 포탄을 쏟아부었어. 중공군 1만 명과 3,500명이나 되는 국군이 죽거나 다쳤지. 395고지라고 하던 이 언덕이, 포격으로 푸나무들이 모두 사라져 민둥산이 되고 말았어. 그 모습이 마치 하얀 말이 쓰러진 듯하게 보여서 백마고지로 바꿔 불렀대.     

백마고지 전투 


회담장에서 큰소리치려고 작은 언덕에서라도 피를 튀기는 전투를 벌였다는구나.      


“고지를 많이 차지할수록 회담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고지를 최대한 지키거나, 적에게 넘어간 고지를 빼앗아 오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적 또한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1)”     


백선엽 장군이 털어놓은 말이야. 병사와 소녀가 찾아간 사단 사령부 회의에서도 이런 속셈을 콕 짚어주는 말이 나와.      


이 언덕은 이 전쟁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비록 묻혀버린 조그맣고 힘없는 소리였지만, 본질을 꿰뚫어 본 말씀이 아닐 수 없어. 정의로운 전쟁이니 어쩌고 하고 그럴듯하게 부르더라도 목숨을 앗는 전쟁은 보잘것없다는 말이야. 전쟁해야 한다고 부추기는 사람들은 제 잇속을 차리려는 괴물들이야. 아니면 멋모르고 부추김에 놀아나는 사람들이거나. 이런 이들이 병사에게 명예를 지키려고 싸운다고 심어주고, 하느님과 조국, 자유와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전체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전쟁을 하는 것이라고 심어줬어.      


병사와 소녀는 이번엔 은행가들과 무기상들이 있는 곳으로 갔어. 화려한 사무실에서 시가를 피우면서 전쟁을 하는 두 나라가 모두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 이 사람들은 주판알 튕기기 바빴어. 돈을 빌려줘야 평화 협상이 깨질 것이라고 하면서….     

 

“좋아요. 그들도 부자가 되기를 원해요. 전쟁으로만 가능한 일이지요. 모두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평화 협상을 하는 자들은 전쟁터에서 죽지 않지요.”     


병사 손을 잡고 은행을 떠나면서 소녀는 또 그들은 아저씨를 속였어요. 라고 말해. 이제 병사는 권력을 쥔 이들이 지닌 속셈을 속속들이 알아차렸어.      

조르디 시에라 이 파브라 지음/마벨 피에롤라 그림/문학과지성사/값 9,500원

죽어도 괜찮은 목숨은 없어. 전쟁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전쟁이 어째서 일어나는지 알아야 해. 아무리 번지르르하게 겉치레하더라도 전쟁은 깊은 사상을 바탕에 두고 벌이는 것이 아니야.      

<전쟁론>이란 책을 펴낸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욕심과 자만에서 태어나며 눈물과 괴로움 그리고 피로 얼룩지는 끔찍한 일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라며 흔들어대고, 헤밍웨이도 “전쟁에서 아름답거나 보기 좋은 죽음 따위란 없다. 그대는 아무 까닭 없이 개처럼 죽을 것이다.”하고 짚었어. 

전쟁은 죽임이야!     


‘한평생 살아가는 데 가장 끔찍한 것이 전쟁’이라고 하는 조그맣고 낮은 목소리쯤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느냐고? 커다란 폭포도 줄기를 따라가 보면 깊은 산속에 아주 조그만 옹달샘에서 비롯하고, ‘제너럴 셔먼’이라고 키가 25층 아파트보다 더 크다는 세쿼이아 나무도 씨는 손톱만 하다더구나. 그러니까 전쟁이 얼마나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끔찍한지 아는 사람들은 내남직없이 널리 알려야 해. 전쟁하려는 이들이 품은 속셈을 하나하나 파헤쳐서 퍼뜨려야 한다는 말이야.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담은 평화 풀씨 뿌리기를 쉬지 않아야 하고. 

평화는 살림이야!          



❏출처

1) 중앙일보 2010년 11월 01일 / 6·25 전쟁 60년/ 불붙은 고지 쟁탈전



작가의 이전글 오늘, 살림하기 딱 좋은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