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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말 헌제 선고문, 말결에 열쇠가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를 펴내며

by 변택주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우리 아이들과 슬기를 머금은 우리말 단비를 맞고 싶어서 책을 한 권 펴냈어요.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이에요.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겪는 백성들이 안타까워 소리를 묶어낸 세종 임금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나올 수 없었을 책입니다.

87999364-10f7-4e2f-b207-15976f8c1977.png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글 변택주 그림 이승열 / 원더박스 / 값 15,000

저는 몸이 아파 중학교 1학년을 네 해에 걸쳐 세 번 다니다 말았어요. 한자나 영어를 잘 몰라 우리말을 곱씹다 보니 뜻글자라는 한자보다 소리글에 담긴 우리 말결이 뜻을 헤아리기 더 쉽다는 것을 알았지요.

이 바탕에서 요즘 우리 아이들이 문해력이 떨어져 문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 문해력을 탓하기에 앞서 아이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가르쳤는지 짚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버스와 지하철을 처음 환승 하게 되었을 때 중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 셋이 버스에 오르다가 한 아이가 “야, 환승이 뭐냐?” 하고 물었어요. 한 아이가 “몰라. 너는 아니?”하며 따라 타는 다른 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아이도 “나도 몰라.”라고 하기에 내가 “그건 갈아탄다는 말이야.”라고 하자 “에이, 그럼 ‘갈아탑니다’라고 하지.”라며 툴툴댔어요.

IE003438236_STD.jpg 헌법재판소는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대통령 파면을 선고한다. 오마이뉴스 갈무리


그런데 이번에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하면서 쓴 말이 딱딱한 법률용어가 아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을 써서 나라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어요. 탄핵 적법 요건, 탄핵이 법에 맞는지를 드러낸 처음 여섯 꼭지만 함께 볼까요.


지금부터 2024헌나8 대통령 윤석열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적법 요건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➀ 이 사건 계엄 선포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는지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고위공직자의 헌법 및 법률 위반으로부터 헌법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탄핵심판의 취지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 계엄 선포가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요하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 헌법 및 법률 위반 여부를 심사할 수 있습니다.

② 국회 법사위의 조사 없이 이 사건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점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헌법은 국회의 소추 절차를 입법에 맡기고 있고, 국회법은 법사위 조사 여부를 국회의 재량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사위의 조사가 없었다고 하여 탄핵소추 의결이 부적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③ 이 사건 탄핵소추안의 의결이 일사부재의 원칙에 위반되는지 여부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국회법은 부결된 안건을 같은 회기 중에 다시 발의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피청구인에 대한 1차 탄핵소추안이 제418회 정기회 회기에 투표 불성립되었지만, 이 사건 탄핵소추안은 제419회 임시회 회기 중에 발의되었으므로, 일사부재의 원칙에 위반되지 않습니다.

한편 이에 대해서는 다른 회기에도 탄핵소추안의 발의 횟수를 제한하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재판관 정형식의 보충의견이 있습니다.

④ 이 사건 계엄이 단시간 안에 해제되었고, 이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보호이익이 흠결되었는지 여부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이 사건 계엄이 해제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 계엄으로 인하여 이 사건 탄핵 사유는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심판의 이익이 부정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⑤ 소추의결서에서 내란죄 등 형법 위반 행위로 구성하였던 것을 탄핵심판 청구 이후에 헌법 위반 행위로 포섭하여 주장한 점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기본적 사실관계는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적용 법조문을 철회·변경하는 것은 소추 사유의 철회·변경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허용됩니다.

피청구인은 소추 사유에 내란죄 관련 부분이 없었다면 의결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도 주장하지만, 이는 가정적 주장에 불과하며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근거도 없습니다.

⑥ 대통령의 지위를 탈취하기 위하여 탄핵소추권을 남용하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이 사건 탄핵소추안의 의결 과정이 적법하고, 피소추자의 헌법 또는 법률 위반이 일정 수준 이상 소명되었으므로, 탄핵소추권이 남용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 탄핵심판 청구는 적법합니다.


쉬운 말이 지닌 힘을 새길 수 있는 좋은 글월이에요.

글을 이토록 쉽고 결 곱게 쓰는 힘은 두 가지가 있어요. 말을 하는 까닭은 내가 품은 뜻을 남에게 잘 알리려는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우리 말과 글이 지닌 맛을 잘 알기 때문에요. 그러려면 어려서부터 우리말에 담긴 뜻을 잘 새기고 다져서 말과 글을 참답게 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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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고구마 넝쿨을 들어 올리면 고구마가 줄줄이 달려 올라오듯이 우리말은 낱말 하나를 집어 올리면 닮은 말들이 줄줄이 달려 나와요.


이를테면 튼튼하다는 든든하다는 말이 더 세진 것이고 탄탄하다는 단단하다는 말이 더 세진 말이에요. 그래서 몸이 건강하다고 하기보다는 몸이 튼튼하다고 해야 생각이 넓어진다고 생각해요. 밥을 든든하게 먹거나 겨울에 옷을 든든하게 입으면 몸을 튼튼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때맞춰 운동하면 몸이 단단해지고 꾸준히 하면 탄탄한 몸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조금만 곱씹어보면 든든하다와 단단하다가 사촌 간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요.


하나를 알고 나면 어렵지 않게 이어지는 다른 말뜻을 새길 수 있었다는 말씀이에요. 이렇게 말에 담긴 뜻을 풀 열쇠를 하나둘 찾았어요. 이 열쇠를 우리 아이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 싶어서 심심할 때마다 그런 말들을 길어 올려 이리저리 다듬다 보니 책 한 권이 묶였어요.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400쪽이 넘치도록 쓴 글을 다듬고 다듬은 끝에 130쪽으로 가붓하니 줄였어요. 얇아도 깊이 있는 책을 꼭 빚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가방끈이 짧은 내가 아주 커다란 잘못을 하지 않고 한평생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열 살 안팎에 배운 도덕에서 받은 힘이 컸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오면서 얻은 적은 슬기나마 이 또래 아이들과 나누고 싶어서 <10대를 위한 내 말 사용 설명서>, <벼리는 불교가 궁금해>, <한글꽃을 피운 소녀 의병>과 같은 책을 펴냈어요.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도 그 흐름 가운데 한 줄기예요. 이 책에서 다룬 낱말은 다음과 같아요.


결 / 꿈틀꿈틀 / 남 / 넉넉하다 / 더, 덜, 덤 / 돈 / 동무 / 든든, 튼튼, 단단, 탄탄 / 말 / 맹 / 먼지 / 밉다 / 반기다 / 비로소, 마침내 / 빛, 볕 / 사랑 / 살 / 살림살이 / 생각 / 어, 아 / 열심, 한심 / 울음 / 이름 / 일 / 있다, 없다 / 저절로, 스스로 / 참, 거짓 / 처음 / 한가위 / 힘껏


말에 담긴 뜻만이 아니라, 말을 따라가며 생각을 넓히는 얼개도 담아냈어요. 이 가운데서 몇 마디 꺼내어 나눠볼까요?


남은 ‘나를 받쳐 주고 나를 북돋아 주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말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

…프랑스에는 이런 속담도 있대.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냐? 그럼 네가 뭘 먹었는지, 누구를 만나서 무슨 말을 듣고, 뭘 읽었는지 알려다오.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알려 주마.’ 나는 내가 아닌 남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야. -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18쪽


나는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처럼 어리어 오르는 것이라고 여겨. 밤이 낮으로 바뀔 때 느닷없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시나브로 희뿌옇게 바뀌면서 아침이 밝아오듯이, 꽃이 급작스럽게 활짝 피지 않고 몽글몽글 몽우리가 맺히면서 천천히 벌어지듯이, 돌다리도 두드리는 마음으로 그 사람 마음이 어떤지 살펴보며 천천히 다가가야 그 사람도 내 마음을 헤아리면서 내 뜻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서로 다가서면서 좋은 느낌이 거듭 이어지면서 서로 아끼는 마음이 어리어 오르다가 무르익어야 사랑이 활짝 피어나지. -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74~75쪽


그런데 아니? ‘한심’이 빠진 ‘열심’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열심은 더울 열(熱)과 마음 심(心)이 모여 이룬 낱말이야.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느라 마음이 땀이 날 만큼 데워졌다는 뜻이지.

…감기에 걸린 적 있지? 감기에 걸려 체온이 1도나 2도만 높아져도 몸이 펄펄 끓고 머리가 아파서 견디기 어렵잖아. 그럴 땐 어떻게 해? 병원에 가서 열 내리는 주사를 맞고 해열제도 받아 먹지? 얼음찜질도 하고.

…마음도 몸과 마찬가지야. 무엇을 하느라 뜨거워진 마음에도 소나기가 내리고 밤이 와야 해. 나는 그 소나기와 밤이 한심이라고 생각해. 한심은 차가울 한(寒)과 마음 심(心)이 모여 이룬 낱말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마음을 서늘하니 식힌다는 뜻이야. -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 9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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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세월 우리말을 새겨 왔다고 여기고 있는 나도 아직 모르는 말투성이에요. 아는 줄 알고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긋났다는 것을 알고 놀란 적도 적지 않아요. 그런데 알고 하는 말과 잘 모르고 하는 말은 달라요. 하늘과 땅만큼이나. 내가 하는 말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알고 말하면 품은 뜻을 또렷하고 틀림없이 알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전하고 무척 가까워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거나 글을 쓰면서 이 낱말이 얼마나 품이 너른지 얼마나 깊이 있는 뜻을 담았는지 사부작사부작 이 사전 저 사전을 오가면서 들춰 보곤 하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뜻을 찾아내고는 살포슴 짓기도 해요. 그러면서 우리 말결에 생각이 깊어지는 열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가만가만 살살 더듬어가다 보면 우리말에는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풀어 줄 숨겨진 열쇠가 아주 많아요. <생각이 깊어지는 열세 살 우리말 공부>는 열세 살 무렵 이 열쇠를 찾기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이끌어 펴낸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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