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참새
드라마 '미지의 서울'은 참 가슴 뭉클한 작품이었다. 아직도 아버지와 이별 중인 나라서 더욱 그랬을 수도 있고, 가족들의 끈끈한 애증을 잘 그려내서일 수도 있다. 특히 마지막 회에서는 대성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지의 꿈속에서 할머니는 자유롭게 움직이고 대화할 수 있는 예전의 건강한 모습이었다. 미지는 그런 할머니가 반가웠지만, 출입구를 찾지 못하는 모습에 '이별'을 예견하고, 할머니를 부등 껴안고 엉엉 울며 애원했다.
"할머니, 가지 마, 가지 말고 나랑 있어."
이 대사였다.
울음 폭탄을 자극한 말은.
'더 있다 갈게.'가 아니다. '더 버틸 수 있어.'였다.
세상에 남을 혈육을 위해 나날이 고통을 '더 버티는 것'이다. 작년 1년 내내 아픈 아버지를 보면서 '버티고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살고자 하는 의욕이 하나도 없지만 가족들을 위해 견디고 계셨다. 웃음을 짜내면서 겨우 겨우. 그런 아버지의 고통을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한 번이라도 더 웃게 만들려 애썼을 뿐이다. 그럼 그 속을 다 아는 아버지는 소리 없이 웃고 또 웃으셨다. 우리 아버지는 '버텨주셨다.' 각시와 자식들을 위해.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소리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마을에서 '백로'를 봤다. 그 뒤로도 유난히 흰나비가 주변을 자주 날아다녔다. 예전 우리 요미가 노랑 나비로 다니던 것처럼. 이게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마음이 가는 새와 나비가 생긴 것이다. 드라마 '도깨비'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나의 간절함이 만드는 억지일 수도 있지만. 뭔가 나와 보폭을 같이 하는 흰나비는 그냥 지나쳐지질 않았다. 가만히 보고 눈에 담았다. 그런데 남들에게 말 못 할 나의 고민이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할머니의 말씀으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거의 일 년 만에 언니와 단 둘이 간 커피숍에서, 유난히 빤히 바라보는 참새를 보았다. 뭐 저렇게 직관중인가? 싶을 정도로. 사진을 찍겠다고 휴대전화를 든 순간 '비행 참새'의 자태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 참새가 우리 아빠일리는 없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내 간절함이 나비 한 마리에 작은 참새 한 마리에 그리고 백로의 날갯짓에서 아버지를 그리는 것이지. 그런 나의 헛헛함을 그대로 대사로 옮긴 '미지의 서울'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언니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던 나의 헛헛한 마음을. 드라마가 읽어줬다. 그래서 위로가 되었고 위안을 얻었다. 때로 그 어떤 말보다 드라만 한 장면이 내 마음을 읽어줄 때가 있다. 미지의 서울은 참 잘 만든, 온기가 느껴지는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