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모두 내 사랑 (2)

12살의 어린 중

by 나노


인만의 기운이 눈에 띄게 쇠하자, 순례의 마음은 조갈증이 났다. 꼬물거리는 어린 자식들과 타성바지 새끼들에게 유일하게 그늘이 되어준 것은 인만뿐이었다. 어떤 설움이 있어도, 내 자식들이 아비 그늘에서 배곯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하지만 나날이 무너져 가는 인만의 모습을 지켜보자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하나면 족했다.

아니 하나도 과했다.

지아비 잃은 그 설움과 복받치는 원망의 세월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였다. 몸에 좋다는 약을 지성으로 달여 먹여도 기침은 줄지 않았다. 애면글면 애간장이 녹아내리던 순례에게 ‘검단사’ 소식을 전해준 것은 아랫집 아짐이었다. 검단사 스님이 사주 명리도 잘 본다더라, 속 아픈 병자도 잘 나사 준다는 약숫물이 있더랬다. 집에서 검단사가 있는 매내미골까지는 70리 길이었다. 꼬박 하룻밤을 걸어야 했다. 어린것들이 눈에 밟혔지만 당장 급한 것은 인만의 건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을 내어놓아도 아깝지 않았다. 영험한 검단사 소식을 듣고 이튿날 쌀 한 됫박을 싸매 들고 곧장 길을 나섰다. 아랫집 아짐에게 아이들을 단단히 부탁하고, 이른 저녁을 지어 먹인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눈치 빠른 영기가 봇짐을 뺏어 들고는 동행을 자청하였다. 매내미골은 초행이라 막막했는데 알아서 나서 주니 제법 든든하였다. 영기는 열 살을 넘기며 부쩍 키가 커서인지 더욱 의지가 되었다. 해 지기 전에 출발해서 길을 재촉했어도 달이 중천에 떠서야 검단사에 닿았다. 작은 도량에 맑은 기운이 서린 것이, 절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졌다. 저녁 공양도 끝난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송구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주가 법당 앞에 서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합장으로 발길을 열어주었다. 같이 합장을 올리며 법당에 올라가 백팔배를 하였다. 주린 배를 참으며 눈치껏 어미를 따라 절을 하는 영기 녀석을 지주가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것이 구슬땀을 흘리며 지성스레 빌고 또 빌었다. 부엌에서는 꼬장꼬장해 보이는 보살이 궁시렁궁시렁거리며 불을 지폈고, 그 옆에 인자해 보이는 다른 보살이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뭐 지금 무엇보다 중한 것은 체면도 염치도 아닌 가장의 몸수이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절이 끝나기를 기다려 부엌에 있던 인상 좋은 보살이 보리밥상을 챙겨주었다. 요기를 하고 나자, 정좌하고 있던 지주 스님이 말을 이었다.

순례는 다급히 낭군의 생년월시를 말했다.

지주는 가만히 듣고 앉아서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억만 겁 같던 시간이 흘렀다.

그러더니 조용히 옆에 앉아 있던 영기의 얼굴을 뜯어보며, 아이의 생년월시를 물었다.


순례의 가슴을 철렁하였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것을... 말하지 않던 어미의 속내도 은근하게 달래주고, 일의 추이를 짐작하는 재능도 남달랐다. 다만 영특하여 그러려니 했던 것을... 문득 겁이 났다. 검단사 지주는 영기가 중의 사주를 타고났다고 하였다. 절에다 양부모를 삼아 두고 절밥을 먹어야 길게 살 수 있다고 하였다. 아픈 남편보다 더 의지하고 살던 영기를 이곳에 두고 가야 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식이 아비를 빌어주면, 아비의 명이 더 길어진다니... 집에 누워 있던 인만을 생각하자, 입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타성바지로 눈칫밥 먹으며 살아온 것도 안쓰러운데, 이제 절밥을 먹으며 중으로 살아야 한다니. 무슨 이런 기구한 운명이 있단 말인가? 순례는 영기의 팔자가 꼭 어미를 닮은 것만 같아서 가슴팍이 터질 듯 아팠다. 그때 순례의 손을 꼭 잡아 준 것이 영기였다. 자신은 다 괜찮다는 듯, 그렇게 눈빛으로 제 어미를 달래주었다.


그날 밤 달빛을 벗 삼아 집으로 돌아오며, 순례는 검단사 약숫물을 담은 물동이에서 한 방울의 물도 흐르지 않게 조심 또 조심히 걸으며 눈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렇게 서너 번 불공을 올린 뒤에, 인만은 어린 자식들만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허나 놀라운 것은 인심(人心)이었다. 살아생전 인만에게 돈을 빌려 갔던 사람들이 모르쇠로 나오거나, 금액을 속여 다 갚았다고 거짓을 말하였다. 집안이 쇠락하는 것은 아주 한 순간이었다. 임0는 7살, 중0는 2살. 그리고 뱃속에 막내아들이 희망처럼 자라고 있었다.

어린 자식의 입이 그렇게 무서운 것은 처음이었다. 기울어가는 살림에 큰아들 00가 가구공장에서 번 돈을 붙여 와도 큰 힘이 되지 못하였다. 제 아비 상을 치르고는, 한 입이라도 덜어 얼마라도 보태겠다면서 영기는 제 발로 검단사에 들어갔다.

그때가 12살이었다.

부모 그늘에서 한창 커야 할

그 어린 나이 12살.


순례는 그날 이후로 다리를 뻗고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영기가 승근이가 되고 봄꽃같은 며느리를 데려오기까지는...

어린 자식의 그늘에 산다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배속의 어린 자식과 천둥벌거숭이 같은 두 아들을 놔두고 어디도 갈 수 없었다.

조금 더 큰 내 새끼인 00와 영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제 그 사랑 어디서 받을까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