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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를 위한 끄덕임

박수수 묘지명

by 나노

20대 후반.

온몸으로 찬 기운을 스몄던 적이 있었다. 손마디마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제발 좀 가만히 놔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저 속으로 꾹 참고 견뎌야만 했다. 지나가는 강아지조차도 얽히고설켜 치고 가던 시절이었다. 내 걷잡을 수 없던 선택의 무게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까지 온동 내 삶을 총공격하던 때였다. 운이 좋아 뉴스 속보가 되는 악운을 피했지, 저 많은 세상의 스크린 속에 물고기밥이 될 뻔했던 위기의 칼날 같던 시간이었다. 남들은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다지만, 내게 20대는 명예와 치욕이 엇갈리던, 결코 절대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상상조차 치떨리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던 그 시절,

나에게 한 가닥 삶의 끈이 되어준 것이 바로 '이미 떠난 자를 위한 묘지명'이었다. 죽은 자를 위로하는 글이 '죽을 각오로 버티며 살고 있던 나'를 살리는 글이 된 것이다. 죽음을 기리는 글이 삶을 다독이는 글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우연히 접한 박지원의 '박수수 묘지명'은 그렇게 숨구멍이 되어 주었다. 나에게는. 갑작스럽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애통함으로 꾸역꾸역 써 내려간 '묘지명'이 나를 붙잡았다. 마치 '너의 죽음에 주변의 가까운 이들이 이렇게 아파할 거야'라고 속삭이듯이, 글귀가 눈에 박혀서 마음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박수수 묘지명'은 죽은 '박수수'를 기리던 박지원의 손길이었다.


"병이 깊이 들었는데 더욱 술을 마셨다"


이 글귀를 눈에 담고 얼마나 울었는가 모른다. 수수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가족들의 고통이나 애달픔을 구구절절 다루지 않았어도, 떠난 혈족을 지켜보는 이의 고통이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때 내 마음을 대변한 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10여 년이 흘렀고, 그 시절은 아득하게 뭉쳐진 형태로만 기억에 남아서 자세히 떠올리기도 어렵다. 아니 흐릿해져야만 했기에 스스로 기억을 지워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박수수는 박지원의 사촌 조카였다.

명망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대가 끊긴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지키던 자였다. 쓸데없이 세상만사의 흐름을 눈으로 읽고 노림수를 파악할 정도로 현명했고, 필요 이상으로 속내를 감추는 과묵함까지 지녔다. 문필 또한 뛰어났지만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겨 유명세를 날리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견고한 세상의 틀과 흐르는 바람결 같은 품성. 가문을 지켜야 하는 수장의 책임감과 문필가로서의 들끓는 고약한 기질. 병약한 몸과 운명을 읽을 줄 아는 육감까지. 뭐 이리 상충되는 것이 많았던 것인지. 결국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당시 남들 부러워할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숨쉬기조차 버거웠던 나에게. 그의 생은 위안이고 안도감이었다. 가족에게조차 말 못 할, 아니 어쩌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몰라서 무자비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터였다. 그리고 그런 박수수의 생을 쓰다듬어 주며, 기억 속에서 다시 꺼내주었던 것이 박지원의 묘지문이었다. 마치 '너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야. 이런 고통을 겪은 이가 여기에도 있어'라고 말하듯이. 이 글을 수십 번 읽어 내려가며 그렇게 점점 원망과 서러움, 답답함, 서글픔이 잦아들었던 것 같아. 그리고 더 살아보기를 마음먹었던 것 같아. 어쩌면 살궁리를, 살아갈 핑계를 찾았다는 말이 맞았을 것이다. 30살의 문턱을 넘어서며 서서히 몸속에 울던 바스락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40의 언덕에서 노닐고 있다.


지금도 사실 모르겠다. 그 시절이 그토록 괴롭고 힘들었던 까닭을.

숨결 하나하나가 통증으로 느껴졌고, 내 선택으로 달라지게 없던. 어찌 보면 떡을 손에 쥐고 울면서 멈춰 서 있던 돌잡이 같던 우두망찰의 시절. 꽉 들어찬 장기판 속 '졸'로서 그저 세상이 어서 빨리 나를 잡아먹어주기를 간절기 빌고 또 빌었던 것 같아. 그래야만 끝날 것 같아서. 아니 끝내고 싶었다. 모두 그만하고 싶었다. 온통 멈추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기에.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 다시 되돌아보면, 그 통증의 원인은 찾기 어렵다. 다만 결정적 한 방을 주변 모든 것으로부터 나누어 골고루 두르려 맞고 있었을 뿐.


더 살아 보니. 더 살다 보니. 이제는 그 바스럭임과 발맞추어 걷는 법도 터득했다.


'멈춤! 포기'

내 생의 몫은 나를 이끌고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다.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과 저렴한 체력, 불필요한 책임감과 쉽게 지치는 근성. 지금도 여전히 드문드문 박수수가 떠오른다. 이 생코롬한 가을바람이 불 때면 특히나. 마치 "잘 견디고 있니? 넌" 이라고 되물어 보듯. 누군가 그의 옷깃을 살짝만 잡아줬더라면 그도 터덜터덜 그저 그런 나처럼 겨우 겨우 살아냈을까?

여전히 나는 모르겠다. 그 시절 날 붙잡아 준 것이, 나의 위안이 된 것이, 박지원의 따스한 손길이었는지. 아니면 박수수의 '헉' 소리 나도록 공감되는 삶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내가 떠난 아버지를 기리는 방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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