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성장기
85개 리스트를 완성한 뒤
나는 드디어 현실 검증에 나섰다.
"이번엔 체계적으로! 실패는 없다!"
라는 다짐과 함께.
소개팅 앱에서 만난 첫 번째 남자.
말수가 적었지만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잘 들어줬다.
MBTI가 INFP라길래, 내 동생과 같아서 괜히 친근감도 들었다.
리스트 체크를 해봤다.
11. 나에게만 다정함 - 체크
12. 계획적인 사람 - 일단 체크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상했다.
답장은 오는데, 자기 얘기는 하나도 없었다.
마치 내가 독백극을 하고
그는 객석에서 고개만 끄덕이는 관객 같았다.
32.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 이 남자는 표현 자체가 서툴러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
동네 모임에서 만난 두 번째 남자.
처음 마주한 순간, 이미 게임 오버였다.
1. 키 180cm 이상
- 그는 내 키와 거의 비슷했다. 참고로 나는 169cm다.
키 문제는 그렇다 치자. 진짜 문제는 대화였다.
"주식이 얼마, 현금이 얼마..."
본인 자랑을 쉼 없이 늘어놓는 걸 보며 나는 확신했다.
'이건 소개팅이 아니라 재무 상담이구나.'
게다가 "이상형 없어요?"라고 집요하게 묻더니
내가 없다고 하자 "그럼 친구라도 소개해주세요"라는 거다.
황당했지만, 솔로인 친구를 소개해주자 "사진은 없나요?"
"사진을 보니 제 취향이 아닌데, 다른 친구는요?"
계속되는 요구 사항에 순간 속으로 외쳤다.
'내가 소개팅 앱이냐?'
다시 앱에서 만난 세 번째 남자는 달랐다.
대화도 잘 통했고, 같은 동네라는 것도 신기했다.
내 단골 카페에서 마주 앉은 그는 멀끔한 인상이었다.
3. 깨끗한 피부 - 체크
10. 호감형의 선한 인상 - 체크
이야기하는 내내 내 눈을 바라보며 웃는 표정이 인상 깊었다.
다만 말을 아끼는 편이라 대화가 조금 답답하긴 했다.
만남이 끝나고 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줬는데
그는 끝내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면서 중얼거렸다.
‘아, 역시 관심이 없었구나.’
그런데 잠시 후, 앱으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좋아요! 안 물어보셔서 제가 마음에 안 드는 줄 알았어요.”
그는 곧 수줍게 고백했다.
“사실 물어보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자꾸 어긋나서요. 혹시 괜찮으시면 카톡으로 이어가도 될까요?”
그렇게 우리는 앱에서 카톡으로 대화를 옮겼다.
단순한 소개팅이 하나의 인연으로 바뀌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85개 리스트는 나쁜 사람을 걸러내는 데엔
충분했지만 좋은 사람을 찾아주진 못했다.
사랑은 결국 체크박스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눈빛과 마음에서 드러나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85개 중 상당 부분을 충족했지만
정작 내가 반한 건 리스트에 적히지 못한 것들이었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태도
꿈을 말할 때 반짝이던 눈빛
그리고 타이밍을 놓쳤다고 솔직히 말해준 진심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글자가 아니라, 눈앞의 사람이 나를 움직이고 있다는 걸.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