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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봄 노동자이다

by 황신혜신



나는 노동자이다.


다양한 대상을 돌보는 돌봄 노동자이자, 각기 다른 프로젝트 몇몇 개에 참여하고 있는 자유(?)일꾼이다. 돌봄 노동에도 대상은 다양하다. 아이, 노인, 그리고 남편(?).


아이는 열 살이라 엄마가 없으면 게임을 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 다행인가? 어떤 때는 엄마 없을 때 무서우면 게임을 하라고 독려하기도 한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부비대는 시간이 일주 혹은 이주 동안 소원해지면, 혼잣말을 많이 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그러면 짬을 내어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도 아이는 아직까지는 그저 손잡고 함께 산책하며 대화만 진심으로 나누어도 많이 너그러워진다.


일주일에 2-3일 학교에 가고 그나마 코로나가 무서워서 집에서 점심을 먹겠다는 아이의 요청에 모든 일은 가능하면 점심 차려준 이후로 미룬다. 밥 차려 주고 나가면 아빠가 퇴근할 때까지 혼자 있는 것이다. 혼자있는 시간 동안 어떤 유투브에 노출될지 걱정이 든다.


4-5 년 전 내 아버지의 오랜 요양병원 생활이 있었고, 이제는 시아버지가 요양병원 생활을 시작하셨다. 모두들 살기 바뻐서, 그래도 시간이 자유로운 내가 간병인도 알아보고, 병원 예약도 하고 의사 면담 예약도 하고 일을 처리한다.


늘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이에게도 미안하고 때때로 예기치않은 돌봄 노동으로 약속된 일들을 하지 못할 때 굉장히 화가 났다. 너무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고 자책했다. 늘 플랜B를 생각했고 초조했다. 모든지 빨리빠리 처리해야 했다. 조절할 수 있는 일은 미리 해놓아야 추후 발생할 수 있는 돌봄 노동 카테고리의 돌발성에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을 바꿨다. 돌봄도 나의 일이다. 노동이다. 보수가 없지만, 나의 가장 중요한 노동이다. 나는 돌봄을 포함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일꾼으로 참여하고 있고, 돌봄 노동은 특성상, 가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과업이다 생각하려고 한다. 산부인과 의사가 외래를 하다가 응급 출산을 가면 외래환자들 일정은 뒤로 밀리거나 취소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돌봄의 돌발성을 응급출산처럼 생각하련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일. 성장하고 생존하는 일, 말 그대로 먹고 사는 일.


최근 읽은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에서 “돌봄 노동을 다루지 않은 채 노동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물고기의 생태를 쓰면서 물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되는 저렴한 노동이 유지되려면 돌봄과 같은 다른 노동은 아무 보수 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한다. 즉, 돌보고 영양을 공급하고 인간 공동체를 양육하는 노동은 무보수여야만 임금노동 시스템 전체가 작동하고 자본주의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가사 노동은 철저히 임금노동 영역 밖에 있는 것이어서 자연이 기업에 주는 공짜 선물처럼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호의로 여겨졌다” 그 노동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태엽이 짹각 짹각 돌아가기 위해 저 밑에 작은 톱니바퀴로 온몸으로 태엽이 멈추지 못하게 막고 있는 수많은 저렴한 것들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입장은 무엇일까?


아이 아빠에게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 할까? 돌봄 노동에 타당한 임금을 요구하여야 할까? 대상은 누구일까? 돌봄을 적당히 해야 할까? 생각이 오간다.


오늘 한 작은 행동은 나는 돌봄 노동으로 인하여 그 시간에 회의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정사를 질질 끌고 와 함께 하는 일정을 수행하지 못하는 나를 탓하거나, 누군가 아이를 맡아 줄 사람을 찾아 동분서주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마치 선언처럼 그 시간에는 돌봄을 해야 해서 참여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냥 “다른 일정이 있어서 그 날은 안됩니다”라고 했었는 데, 그냥 선언처럼 말하고 싶었다. “돌봄 노동으로 인해 그날은 불가합니다.“


정말 별 것 아닌데, 어떤 일로 내가 참여가 불가한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텐데, 혹은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다.


이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구구절절이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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