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자, 노력하는 자, 재능 있는 자
나이 먹고 동창회를 나가보면 재미있는 일이 많다.
동창회를 나가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크게 잘난 척할 것도 없고, 돈 빌릴 필요도 없이,
그냥 어렸을 때 친구들 다들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나가본다. 회사 사람들과 매일 회사 얘기하는 것도 지겨워, 다른 사람들과 사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있다.
같은 반 1등과 2등 친구 둘의 인생을 보면 느끼는 바가 크다.
1등 친구 A는 집이 부자였다.
각 그랜져를 탄 어머니가 학교에 자주 오셨다. 육성회장인지 뭔지를 하시면서, 교무실과 교장실까지 휘젓고 다니셨고, 반 전체 간식거리도 가져오기도 하셨다.
그리고 하교하는 A를 태우고 학원으로, 과외로 방과 후 여행을 다니시는 것 같았다.
2등 친구 B는 반대였다.
선배들에게 자습서 같은 걸 물려받기도 하고, 선생님들이 협찬받은 책을 주기도 하고, 헌책방에 가서 책을 사기도 하는데 딱히 학원을 다니지는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친구 부모님이 학교에 오시는 일은 없었다.
신기한 건 자리에서 잘 일어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도 제일 늦게 불을 끄고 집에 가는 걸로도 유명했다.
B 친구는 말이 별로 없었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적도 있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이 질문을 해도, 먼저 손을 들고 대답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무작위로 번호를 불러 자신이 대답해야 하는 경우엔 조리 있게 말을 하곤 했다.
‘저렇게 말을 잘했나.’
싶을 정도였다.
잡담은 거의 하지 않는데, 친구들이 물어보면 곧잘 대답을 잘 해주곤 했다. 그럴 때 보면 표정이 밝아 보였다.
A는 유복하게 자라서 그런지 구김살이 없었다.
영화 기생충에 나온 대사처럼 ‘다리미’였다. 대리미.
어머니가 학교를 휘젓고 다니시다 보니, 선생님들도 챙겨주기도 하고, 이래저래 불편함 없이 학교를 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후에 동창회에서 술 한잔 하면서 하는 얘기로는 어머니의 치마 바람이 조금 불편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어느덧 수능일.
그때도 참 추웠는데.
수능 성적이 나온 날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는데, A는 수능 시험을 망치고, B는 평소 정도로 시험을 치러서 점수가 B가 근소하나마 조금 더 높았다.
괜찮은 점수가 나온 것도 맘에 들었겠지만, 수능에서 드디어 반 1등을 해봐서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는 듯했다.
그런데, B가 1등을 한 적이 한번 있었는데, A가 전국 단위 영어시험에 나갔을 때였는데, 그것 때문에 소홀했는지 그때 1등을 놓친 적이 있었다.
맞다. A는 전교에서도 거의 1등을 했고, 어머니의 치마바람으로 학교에서 학교를 대표하는 교외 시험을 전적으로 밀어주었다. 그런 것에 예민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치마바람이 약해서 (이길 수가 없었다. 도저히) A에게 대부분의 기회가 갔었다.
B도 그런 대회에 나가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굳이 본인이 나가겠다 손 들지도, 부모님이 밀어달라 부탁하지도 않아서 그런지 어쩔 수 없이 나가는 한두 번을 빼고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 A는 도저히 S대 법대에 들어갈 수능 성적이 아니었는데, 3장이 넘는 교외 수상 목록을 들고 정시에서 S대 법대에 합격했다.
K대 법대에 합격한 B는 본인이 목표했던 바를 이루었다고 꽤나 만족했던 것 같다. 교외 시험에 적극적으로 나갔으면 본인이 S대 법대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는 얘기인데, 별 상관없는 듯 보였다.
물론 말수가 적은 그 친구는 수능 성적이며 K대 법대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자랑하거나 말조차 하지 않았다. 알음알음 알게 된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말하면 고맙다 한마디로 끝이었다.
당시에는 사법시험으로 판검사와 변호사를 뽑던 시절이라 (로스쿨 시행 전) 사시 합격자들이 발표가 되었다. 그래서, 동창들끼리 우리 학교 출신들 중에 누가 사시에 합격했느니, 행시에 합격했느니 소식이 전해지곤 했다.
B의 사시 합격 소식을 들은 것은, 내가 사원 때였다. 열심히 하더니 그래도 20대에 합격했구나 싶었다.
나중에 만나서 공부 비결을 들어보니,
‘그냥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특별한 재주는 없고, 운동이나 음악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데 공부는 돈도 많이 안 들어서 열심히 했을 뿐이다.
하다 보니 사람들이 공부 잘한다고 인정해줘서 더 하게 되고 계속하다 보니 더 잘하고 싶고, 알고 싶은 게 더 생겨서 꾸준히 했다.
사시 공부할 때는 일어나서 밥 먹을 때 빼고는 계속 책 보고 졸리면 자는 게 일상이었다. 그냥 책 보고 공부할 때가 마음이 제일 편했다.‘
라고 말했다.
10분만 졸린 책을 보고 있으면 꿈나라로 가는 나에게, 몇 년씩 책만 보고 이 친구처럼 살아라는 건 무척 고역이었을 텐데 적성에 맞는다는 게 있긴 있나 보다 했다.
B의 사시 합격 소식 이후 관심사는 A의 합격 소식이었다. 그런 쪽에 밝고 찾아보는 친구 녀석은 몇 년째 합격 명단에 없었다는 말만 전했다.
‘아무리 어머니가 시켰다고 해도, 공부 머리가 있으니까 1등도 했을 텐데 사시는 과외가 안 되는 건가? 사시도 과외가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시험 운이 없나 보네.‘
모르겠다. 남의 인생, 연예인 인생 걱정 말고 내 인생이나 챙기자.
그렇게 몇 년이 흘러 A를 동창회에서 만났다.
뭐하고 지내느냐고 하니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
엥?
법대 들어간 인간이 웬 교사?
상대, 공대 들어가서도 사시 공부해서 변호사 되려고 하는데 이 놈도 참 특이하다.
근데, 너네 어머니는 사시 포기하고 학교 선생님 된다고 하니까 그래 그래라 하셨냐?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물었다.
“당연히 반대가 많으셨지.
학교 다닐 때 억지로 공부하는 것도 사실 힘들었어.
수능 망치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 어머니에게 이왕 이렇게 된 거 교대 가겠다고 했다가 엄청 혼났었지. 결국 운 좋게 법대에 들어갔는데 마음이 불편했어. 공부도 잘 안되고.
학점이 계속 잘 안 나오고, 어머니는 신림동 고시학원 하고 연수원생 과외를 붙여주시겠다고 하는데 싫더라고. 과외는 중고등학교 때도 실컷 했는데 나이 스무 살 넘어 또 과외를 받는다는 게 거부감이 들었어. 하고 싶은 공부도 아니고.
일단 휴학하고 머리를 식힌 다음에, 공부를 다시 시작해서 일단 사시 패스만 하고 판검사 아니 변호사만 되면 인생 바뀌니 말 듣고 공부하라고 하시는데, 휴학하면서 지나 온 삶을 생각해보니 내 인생은 없었더라고. 그냥 좋다니까 계속 시키는 대로 해왔던 거야.
이러다 어머니가 원하는 대학, 직업 심지어는 어머니가 점찍어주시는 여자와 같이 평생 살아야 할 생각 하니 이젠 안 되겠다 싶어서 자퇴하겠다고 말씀드렸어.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일단 법대는 졸업하되, 교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있길래 찾아서 해봤고 지금은 학교 다니고 있어. 만족해. 죽어라 하기 싫은 공부할 필요 없고, 방학이 있어서 맘껏 여행 다닐 수 있고. 옛날에 방 안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할 땐 너무 답답하더라고. “
그렇게 웃는 얼굴이 왠지 인생의 패배자 같아 보이지 않고, 자신이 사는 것에 꽤나 만족해 보였다.
그래, 강압이나 강요에 의해서 내가 하기 싫은 것 하며 사는 게 뭐가 좋겠나. 그러니까 좋은 대학 나와서 판검사 되어서도 사고 치는 인간들이 있는 거 아닐까 반발심리나 보상심리 그런 걸로. 잘은 모르겠지만, A의 표정이 편안하고 밝은 걸로 보여 좋아 보였다.
B는 변호사가 되어서 돈 되는 쪽 보다는 억울한 사람들 도와주는 일 쪽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책도 내고 강연도 다니고 꽤나 바빠 보였다.
‘아이고, 학교 때부터 그렇게 책을 보고, 대학 때도 사시 공부한다면서 책을 봤을 텐데, 저 인간은 책하고 서류 보는 게 지겹지도 않나. 평생을 저렇게 살면서 이젠 아예 책을 내버리네. 신기한 놈이야.‘
그러게 아무리 좋다고 남들이 말해도, 내가 싫으면 그게 뭐가 좋겠나. 시험이든 뭐든 노력이 필요할 텐데 싫어하는 걸 계속하다 보면 질리고 힘들겠지. 좋아하는 것도 계속하다 보면 질리지만, 쉬었다가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아니겠나.
그럼 나는 만족스럽고 내가 원하는 길을 가고 있나.
두 친구를 통해 내 인생을 비춰본다.
브런치에서 보게 된, 유사라 작가님의 글귀가 떠오른다.
“쓰고 싶다는 열정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
(사진 출처 : 빵킴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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