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의 개운함
연휴의 좋은 점은, 별 생각 없이 푹 쉴 수 있다는 점이다. 쉬다 보면 머리도 비워지고 정리되며,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의 수집벽과 어머니의 정리벽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두 가지 성향을 모두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잘 버리지 못하는 성향이 더 큰 것 같다.
특히, 책을 보면 그렇다. 책을 산 적은 있어도 버린 적은 없어서, 책이 너무 많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따로 장소를 마련해야 할 정도다.
(나중에 잘되면 James & book 이라고, 도서관을 만들면 참 좋을 것 같다.)
잘 버리지 못하다 보니, 일단 버리고 깨끗하게 하려는 어머니와 웃지 못할 갈등 상황도 종종 벌어졌다.
“그걸 왜 버리셨어요.”
“몇 년째 보지도 않고, 쓰지도 않아서 버렸다.”
어머니 입장에선, 본인 뱃 속에서 나온 같은 핏줄에, 얼굴도 비슷한데, 왜 저럴까 싶으실 것도 같다.
그래서, 책이나 해외 출장을 가면 사 오는 그 도시의 컵 외에는 따로 모으는 것이 없다. 집에도 뭔가 너무 없는 것을 좋아한다.
모으고 꾸미고 사들이고 하다 보면 집이 고물상이 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돈을 벌면서 건강에 더 신경을 더 쓰게 되어 병원이나 한의원도 크게 아프지 않아도 한 번씩 간다.
건강검진은 회사에서 1년에 한 번씩 하라고 하고 안 하면 회사에서 과태료를 내야 한다나 해서, 병원 사업에서 가장 고수익이라는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받으며 병원에 보탬이 되고 있다.
건강검진 때 의사 분은, 거의
“어디 특별히 아프신데 없으시죠?”
가 전부라 크게 기대를 안 한다.
속된 말로, ‘땡보’라고 하나. 좋은 직업과 직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의사들과 달리 비상 대기하다 호출되고, 위험을 안고 힘들게 큰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에 반해, 자주 가는 한의원에서는, 한의원 장사 중 가장 큰 포션을 차지하는 한약을 팔려고, 성심성의껏 침도 놓아주고 잘해주신다.
사상의학 등 체질 관련된 것도 관심이 많은 편인데, 자주 보는 한의사 분이 이런 말을 해주시기도 한다.
“좀 더 잘 버리셔야 해요.”
속을 잘 비우라는 말씀인 것 같은데, 나에게는 왠지 아침에 시원하게 장을 비우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
잘 먹고 잘 싸는 건 기본이고, 마음 속의 잡념과 번뇌, 미움과 집착 같은 것들도 훌훌 털어버리라는 말로 들린다.
한의사 선생님과 잠시나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등산을 좀 하면 어떻겠냐 하는 추천을 듣고 곧장 회사 산악회에 가입했다.
지금은 산악회 총무가 될 정도로 산행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풀숲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며 땀 흘리며 걷다 보면,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흐르는 땀과 함께 복잡한 머릿 속 생각들이 씻겨져 내려간다.
정상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 보면,
‘아이고, 내가 저런 성냥갑 아파트 하나 마련하려고, 대출 갚으려고 아등 바등, 수많은 사람들과 아옹 다옹하며 그렇게 살고 있나.‘
싶다.
그냥 세끼 밥 건강하게만 먹고, 가족들 편하게 누워서 쉴 수 있는 집과 아플 때 치료받을 돈 정도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욕심과 욕망, 그에 따른 번뇌가 머릿속에 항상 차 있으니, 잠시도 쉬지 못한다. 쉬고 있으면 불안하고, 남들과 이리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며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는 것 아닌가 싶다.
불면증도 그런 욕망과 함께 따라다니는 걱정과 근심 때문이라 생각한다.
크게 심호흡하며 잡념을 내려놓고,
하산하면서 다시 한번 나를 내려놓는다.
그날 밤은 유독 푹 잔다.
몸을 많이 써서 피곤하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산에서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칫솔을 버렸다.
한두 달 쓰고 바꾸라는데 자꾸 까먹고 몇 달을 쓰기도 한다. 하얀 새 칫솔로 닦으니 왠지 더 상쾌한 기분이 든다.
버릴 칫솔로는 화장실 구석을 닦는데 쓰니 좋다.
연휴 때 구석구석 화장실 청소를 하니 청결해져서 마음이 상쾌하다.
특히, 눈에 보이는데 귀찮아서 미뤄둔 곳을 싹싹 밀고 청소하고, 다음에 볼 일을 보러 가면 그렇게 기분이 깔끔할 수 없다.
칫솔처럼 바꿀 때를 자주 놓치는 게 면도기다. 면도기 날을 2주에 한번, 오래 써도 한 달은 쓰지 말라고들 하는데, 언제 바꿨는지 기억도 안 난다. 물끄러미 보았는데 뭔가 지저분해 보일 때, 앗 이대론 더이상 안되겠다 싶을 때 바로 바꾼다.
추울 때 백화점 산책을 하거나, 평일 한가로운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건 좋아하지만, ‘신상’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사치’, ‘광고’, ‘현혹’ 이라는 단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도, 새 칫솔과 새 면도기는 좋다. 깨끗함과 위생을 위함이기 때문이리라.
대청소까지 마치고, 손발톱까지 정리한다. 이럴 땐 왜 이렇게 조금은 지저분하게 자란 손발톱이 잘 보일까. 평상시엔 바빠서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많다.
그리고 시원하게 샤워까지 하고 나오면, 새로운 의욕이 샘솟는다.
이 참에 휴대폰의 불필요한 앱은 모두 지웠다.
연락처만 받아놓고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도 모두 지웠다. 불려 다니느라 일단 들어가 있는 단톡방에서도 모두 나왔다. 나중에 무슨 도움 되는 이야기가 있을까 하고 놔뒀는데, 그냥 나왔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휴대폰에 수만 장의 사진이 있는데, 이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싶은 사진은 싸그리 지웠다. 그리고, 간직하고 싶은 사진은 별도의 저장 공간 (클라우드나 이동식 하드 디스크)에 옮기고, 휴대폰에서는 지웠다.
100 기가 이상의 저장공간이 확보되었다.
(전 256 기가를 씁니다 ^^; 휴대폰 앱이라곤 카톡과 네이버, 이제 브런치 정도 쓰는 인간이. 여유있는 것을 좋아하더보니 이런 폐해가 있습니다. 그래도 큰 사치는 아니고, 남에게 피해주는 건 아니니, 킵 고잉 keep going)
10 기가 이하로 조금 남은 저장 공간이 간당간당해서, 휴대폰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하다가도 바쁘다는 핑계로, 정신없다는 핑계로 정리 못했다. 이 참에 싹 밀어버리니 시원하다.
“비워야 담을 수 있다.”
그릇에 담은 무언가에 비유하면 참 와 닿는 이 말.
올해는 마음의 짐과 어깨를 누르는 부담을 덜고,
무엇을 버릴까를 생각해 보고, 정리하고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일 출근하면 불필요한 회사 메일과 파일, 서류들 싸그리 정리해 버려야겠다. 개인 메일도.
이사를 할 때 다 버리면서 느끼는, 훌훌 털어버림을 간만에 느껴볼 참이다.
어디 더 버릴 것 없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