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in 강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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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은 라떼를 마셨고, 나는 쥬스를 마셨다.
한 손을 가볍게 올리고 말씀하시는 제스처가 독특했지만, (일명 공주님 포즈) 제법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예쁜데, 착하시네.’
하지만, 강남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이야기를 해서 긴장을 탔는지, 쥬스를 금방 다 마셔버렸다.
얼음을 녹여가며 마시고, 물도 마시며 버텼다.
하지만, 여성 분은 엘레강스하게 천천히 드셨다.
‘저래서 여자 분들은 친구들끼리 수다 떨 때, 커피 한잔 시켜서 2시간, 다 마시면 빵이나 케잌 먹으며 추가 1 시간 해서 3시간을 채우나.
난 친구들과 커피 마시러 갈 일도 거의 없지만, 술 마시는 데 아니면 최대 30분 컷인데.‘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대화를 할수록 나와 맞지 않다는 걸 느꼈다.
대기업 회사원과 학교 선생님이라는 궁합은 괜찮아 보일 수 있지만,
부잣집 외동딸과 흙수저 장남의 성장 환경과 가치관, 생활 습관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살다 보니 내 돈 내고 만 오천 원짜리 쥬스를 마셔보네. 평상시엔 15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님 1000원짜리 편의점 1+1 음료인데.
이제 이만 일어나서 집에 가서 만 오천 원짜리 치맥이나 때리고 잠이나 자야겠다.‘
하며 시계를 보았다.
“식사는 뭘로 하시겠어요?“
불쑥 들어온 찔러 총에 잠시 당황했다.
‘집, 집에 갈 건데요.’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신경 써주신 부장님이 소개해주신 자리라 더 그랬다.
‘어딜 가야 하나?
치맥 먹자 하면 눈으로 쏘는 레이저 맞을 것 같고,
근처에 편하게 먹을 파스타 집 어디 없나?‘
해외 출장 가서 햄버거, 파스타, 피자는 지겹게 먹어서 사실 난 한국에선 이런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
하지만,
“전 유럽 여행 가면 한 달 내내 파스타 하고 피자만 먹어도 행복할 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소개팅 녀에게, 된장찌개나 삼겹살은 꺼내지 말아야 할 음식 종류였다.
자기들도 집에서 잘 먹는 음식이면서. 쩝.
“그냥 여기서 드실래요?
여기 스테이크 잘해요.“
이건 뭐 원투 쨉은 없고, 연달아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온 스트레이트에 아찔했다.
‘스, 스테이크...!‘
쥬스가 1.5 만원인데 스테이크는 얼마일까? 에어 컨디션이 잘된 호텔에서조차 식은 땀이 주룩 흘렀다.
‘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할 말 제대로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내 발걸음은 호텔 내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IL FORNO로 가고 있었다.
메뉴판을 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아, 며칠 간은 라면이구나.’
“스테이크랑 파스타랑 샐러드 일단 시키면 되겠죠?”
‘그래, 일단이고 이단이고 그냥 날 죽여라!’
“네, 그러시죠.”
생각과 말은 정반대로 나가고 있었다.
“와인도 한잔할까요?”
“아니, 전 맥주나 한잔 마실께요.”
필사의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다.
“아이, 그러지 말고 와인 한잔 같이 해요.
저 그렇지 않아도 이번 주에 힘들어서 좋아하던 와인 한잔 마시고 싶었단 말이에요. “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별 수 있나.
마지막 방어선 마저 무장해제 되버리며, 뭔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과연 비싼 게 맛있긴 했다.
이런 게 강남 돈 맛인가.
고기도 살살 녹고, 와인도 술술 잘 넘어갔다.
엘레강스한 예쁜 여자, 세련미까지.
그렇게 잘 먹고 잘 마셨다.
술을 마시니 긴장감이 풀리고,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렸다.
이성은,
“빨리 이 위험한 곳을 떠나야 해. 정신 차려, 인간아”
하고 말하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그냥 이렇게 있다가, 집에 가기도 귀찮고,
이 안락한 호텔에서 자고 싶어졌다.
”와인 한잔 더 하실래요?“
재미있게 이야기 하다 보니 어느새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조금 취해서 그럴까 했지만,
오더 할 때 보았던 음식과 와인 가격이, 내 정신줄을 겨우 잡았다.
“조금 많이 마셔서요. 나가시죠.“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며, 술이 완전히 깼다.
대충 10 몇만 원 정도였던 것 같았는데, 20만 원이 훌쩍 넘어 있었다.
부가세와 서비스 봉사료가 추가되어 있었다.
여긴 호텔이잖아, 이 바보 멍충아. 분명히 나 같은데,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소개팅 녀는 이미 밖으로 나가 버리셨다.
‘소개팅 처음 식사는 당연히 남자가 내는 거 아니야.
1차 밥 남자가 계산하고, 2차 커피 여자가 산다는 공식 아닌 공식.‘
뭐, 그런 것이겠지만, 이 정도면 좀 나눠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장님, 날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조카까지 소개시켜주신, 이렇게 몸 둘 바를 모르게 만드신 부장님을 생각했다.
아이고, 오늘 올해 생일잔치 미리 했다.
하고 군말 없이 계산했다.
촥~
시원하고 경쾌하게 카드 긁는 소리가,
내 마음까지 긁고 지나갔다.
누군가 말했던가.
신용카드는 잘못 쓰면 카드가 아니라, 칼이라고.
진짜 흉기 같았다. 읔
“덕분에 잘 먹었어요.”
“네, 저도 잘 먹었어요.”
‘지하철 역 어디지?’
“저기, 제가 좋아하는 와인바 근처에 있는데 가실래요?”
다음에 또 만나서 가자는 말인 줄 알았다.
“네, 그러시죠.”
갈 일이 있을까? 하며 좋게 말하고,
다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타세요.”
그녀가 택시를 잡고 날 불렀다.
“네?“
팔을 잡아 당겨 태우길래 일단 탔다.
“어디 어디로 가주세요.”
도착해서,
엉겁결에 팔짱 끼고 들어간 와인바는 과연 널찍하고 분위기가 한 눈에도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저기 앉아요, 우리”
“네, 네”
“배 부르니까 우리 안주는 간단히 먹어요.”
“네”
허허, 내가 이렇게 말 잘 듣는 인간이었나. 네네 봇이 따로 없네.
비스킷에 과일 조금이라 간단했지만,
가격은 간단하지 않았던 안주와,
(집에서 해 먹으면 5000원 정도일 텐데,
그곳에선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프랑스 와인을 깠다.
“와인 많이 마셔봤는데, 역시 와인은 프랑스 샤또 머시기 예요.”
사또? 조선시대 사또가 프랑스 와이너리에도 있었단 말인가.
5만 원 정도 생각하고 와서, 25만 원이 날아가고,
(당시 내 한 달 생활비가 30만 원이었다. 밥은 거의 구내식당에서 세끼 다 먹던 시절)
내 머리도 이미 안드로메다를 넘어,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 있었다.
이성은,
위험해! 도망쳐야 해!
라고 계속 외치고 있지만, 연약하고 순수한 어린 날의 사무직 A씨는,
고마운(?) 부장님 핑계 대며,
세련된 예쁜 여자, 고급스러운 분위기, 맛있는 와인에 점점 더 젖어들며,
헤~ 하고 있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와인을 다 먹고 나가려는데, 서빙하시는 분이 계산서를 가져왔다.
20만 원이 넘는 액수가 흐릿한 눈 사이로,
명확하게 들어왔다.
‘자기가 마시고 싶은 비싼 와인을 마셨고,
1차는 내가 냈으니 여긴 자기가 계산하겠지.‘
설마.
그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계산도 하지 않고, 그 분은 화장실 다녀올께요 하고 나가버리셨고,
계산대의 사장님은 말없이 나를 쳐다보셨다.
강남 특유의 여유 있고 교양 있는, 친절하면서도 가식적인 자본주의 웃음을 보내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뭐 해, 빨리 계산 안 하고.”
오늘만 두 번째 쎈 ‘촥’을 맞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오니,
쾌활한 목소리로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잘 마셨어요. 오늘 덕분에 너~무 즐거웠어요.”
나라도 즐겁겠다.
택시를 태워 보내고, 택시 차 번호를 기록하고,
나도 택시를 탔다. 웬만해선 택시 안 타는데.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수십만 원을 써서 그런지. 만 몇천 원 나올 택시비는 왠지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택시 타고 집에 가며 한강을 보고 생각했다.
‘아, 오늘 소개팅 한 번에 결국 50만 원 찍었네.
진짜 사귀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만 만나도, 한 달에 데이트 비용만 200 쓰는 건가.
내 월급이 얼마더라 ㅎ
이런 게 찐 사랑인가, 아니 돈 사랑인가 ㅎㅎ‘
그로기 상태가 되어 실성했는지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아래가 3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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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이 괜찮으면, 그다음 이야기를 좀 더 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