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in 강남 (3)
아래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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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지내셨어요?“
“아, 네. 덕분에요
(안 보니까 살겠더라)
잘 지내셨죠?“
그렇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조금 하다,
불쑥 공격이 들어온다.
아마 이전의 근황 토크는,
날 안심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 아니었나 싶다.
“근데, 왜 연락 안 하셨어요?”
급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본인이라면 연락하고 싶으시겠어요‘
받고 더블로 가려다,
소개해주신 부장님을 생각하며,
“아, 그동안 좀 바빴어요.
죄송해요.“
(내가 왜 죄송한 거지 ;;)
“아니에요. 농담한 거예요 ㅎㅎㅎ
저도 바빴어요. 지난번에 재미있었어요. 그쵸?”
‘아니오.’
가 바로 튀어나오기 직전 참았다.
‘재미있었겠지.
난 지금 며칠째 라면 신세다.
강남 가서 개 폼 한번 잘못 잡았다가‘
“네, 네.”
“이번 주말에 뭐 하세요? “
올 것이 왔다.
나의 위기의식을 깨우는, 예의 그 찔러 총!
한번 당하지, 두 번 당하랴!
아무리 할 일 없고, 심심하더라도 당신은 안 만나리.
'당신 같으면 만나고 싶겠어요'
라고 냉정하게 자르려다 참았다.
“친구들하고 모임이 있어요.“
“네에”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실망 섞인 아쉬움에,
못 참고 배려한답시고,
“잘 쉬시고 다음에 봐요.”
라고 한마디 더 한 게 실수였다.
자나 깨나 불, 아니 ‘말’ 조심.
곧 나는 왜 옛 성현들이 말을 줄이라고 하나같이 가르치시는지를 깨닫게 된다.
“지난번에 좋았다며?”
소개해주신 부장님이 물으셨다.
‘아이고 머리야.
50만 원 쓴 걸 말해 말아.‘
하다가 그냥 좋게 말했다.
“좋으신 분인데 저하고는 조금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래? 우리 조카는 맘에 들어하는 눈치던데?
잘 한번 만나봐. 그 집 엄청 부자야.“
하이고, 두 번 맘에 들었다간 잡아먹겠네.
부자면 뭐 하나? 그게 내 돈인가?
내 돈은 커녕, 부자 만나다가 되려 거덜 나게 생겼다.
남의 눈치 보고 돈 타 쓰느니, 그냥 내가 일하고 벌어서 조금만 먹고 살련다.
부장님에게는 그냥,
“ㅎㅎ 네”
하고 말았다.
회사 친구에게도 그때 일을 이야기했다.
긍정맨답게, 친구라고 좋은 말 해주겠다며 이런 말을 했다.
“부모님 돌아가시면 외동딸이니 그 돈 다 부부에게 돌아오겠네. 좋게 생각하고 잘해봐. 거기다 예쁘다며.”
친구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왠지 받으면 안 될 것 같은 벨소리.
(같은 벨소리인데 유독 그런 촉이 올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부장님 때문에라도, 인간적으로라도 받지 않을 수 없는 전화.
한 번은 일부러 받지 않고,
두 번째엔 받았다. 계속 전화할 것 같아서.
대뜸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하소연하신다.
그래서, 속상하셨겠다고 들어주고 힘내시라고 하니,
나 밖에 없다고 한다.
예상치 않은 전개.
전화를 그냥 끊거나 안 받긴 뭐 하고,
대충 듣고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하며
좋게 정리하고 끊으려 했는데, 뭔가 이상하게 cut가 안되었다.
한 시간째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진, 방심할 때 훅 들어온 공격.
“근데, 우리 언제 만나요?”
‘예? 우리가 꼭 다시 만나야 하나요?
돈 받고 몇 시까지 출근해서 일하겠다는 계약서 같은 걸 쓰고 도장 찍었나요?‘
하려다,
또 안 좋은 말은 못 하고,
“아 예, 시간 맞을 때 봐요.“
하고 발을 빼려는데,
낚아채며,
“그래서 언제 시간 되시는데요?”
까지 나온다.
이쯤 되니 그 부장님이 나에게 이야기한 것이,
본인이 궁금해서 물어본 것도 있지만,
이 분이 본인이 먼저 계속 연락하면 좀 그렇기도 하고 없어 보일까 봐,
삼촌 옆구리 찌른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그렇게 다시 만났다.
약속의 땅 강남에서.
와인 공격에 당하지 않으려, 나의 아방이 (아반떼)를 몰고 갔다.
강남은 늘 막힌다.
비싸고 차 막히고 사람 많고.
내가 싫어하는 3박자를 모두 갖춘 이곳이,
왜 아파트 값이 비싼지 그땐 잘 몰랐다.
이번엔 호텔이 아니라, 식당에서 만났다.
밥만 간단히 먹고 바로 헤어지려고.
"안녕하세요."
"넹 ^^ (찡긋)"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원피스. 내 스타일이었다.
화장도 거의 가면을 쓰듯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옅은 화장이었다.
헤~
하며 또 정신 못 차리고 기울어가는 나를 일으켜 세운 건,
휴대폰에 찍어둔 그날의 영수증들이었다.
그렇다. 난 마치 무슨 부적인양 그 영수증을 보며 정신 차리자고, 그 사진들을 담아두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뭐랄까?
이 분이 국가대표 한일전의 상대인 일본 팀으로 보였다.
라이벌 전에서 이기겠다고 잔뜩 독이 올라 있는 상대방.
나를 혹하게 하려고 국대 A 매치에 걸맞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숙적 일본!
아니, 50만 원에 '적' 까진 아니고,
아무튼 경계대상 1호 나카다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당시 회사에서 같이 일할 수 밖에 없지만, 최대한 피하려 했던 빌런 아저씨를 제칠 정도로.
밥 먹고, 차 한잔 마시고 10만원으로 막는다는, 내 계획은 언뜻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역시 축구는 후반전 끝나기 10분 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통한의 역전골을 허용할 수도 있고, 감격의 극장골을 넣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방심하면 안되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이 분의 한마디에 내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근데, 저 고민 있어요."
그녀의 고민은 많았다.
본인도 본인이 약간 철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의외였다. 물론 내가 느끼는 것이 100이라면, 이 분이 스스로 느끼는 건 10 정도)
학교 생활도 들어보니 만만한 게 아니었다.
1년 365일 주말 빼고 계속 일하는 나로서는,
방학이 있는 학교 선생님이 부럽기만 했는데,
박봉에, 회사 뺨치는 눈치 싸움, 변화된 시대에 학부모와 학생 눈치 보는 이야기 등등
이 여린 부잣집 외동딸이 온전히 감당하고 적응하며 다니기엔 꽤나 힘들어 보였다.
'그럼 그냥 관두세요. 집도 부자신데.'
이런 말을 하면 공감 능력 제로의 쓰레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피하고,
"그러셨군요. 힘드셨겠네요."
하며, 가만히 들어드렸다.
"괜찮으시면 와인바 가서 한잔 더 할까요?"
악!
또 그놈의 와인바!
솔직히 마음 같아선,
"그래요. 가시죠.
근데, 지난 번엔 제가 다 냈고, 이번에 밥값까지 제가 냈으니, 이번 와인 바는 B 씨가 내주세요."
도장을 찍고 가고 싶은데,
아시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나.
"저 차 가져왔는데요."
이 부질없는 마지막 저항은,
"아잉, 대리 부르면 되잖아요, 얼른 가요, 우리"
팔짱을 낀 원피스 그녀에게 보기 좋게 까였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한다는 청담동 와인바에 강아지 끌려가듯 다시 갔다.
멍멍.
손~
아이구 착해라.
"어머, 또 오셨네요. 더 멋있어 지셨네요."
아이고, 돈 안 든다고 립 서비스 정말.
아주머니는 내가 아주 예뻐 죽겠지.
오늘도 지난 번 만큼 먹어주라며.
단정하면서도 섹시한 핏의 옷을 입고,
과하지 않은, 엣지있는, 가는 귀걸이까지 딱 떨어지게 한 그 분.
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고, 마치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와 같은,
다시 마주한 자본주의 미소.
아, 누구 말마따나 역사는 반복되는 건가?
아래가 다음 회입니다.
https://brunch.co.kr/@6dad664f134d4c4/325
(마지막 회가 주말 중 이어집니다.
투비컨티뉴
앗, 브런치에서 이 말 이제 쓰면 안 되나? ^^; 역시 알라딘보단 브런치. 파이팅!)
(사진 : 네이버 집돌이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