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으로 봐 버렸다, 2022 한국시리즈 5차전
MVP는 역시 김강민이었다.
보통 경기가 끝나면,
초반에 잘 막은 선발 투수, 위기를 막은 계투, 1점 차 짜릿한 우위를 무실점으로 정리한 마무리, 적시타나 홈런을 때려 낸 타자 등 여럿 중에서 결정적으로 승리에 공헌한 MVP를 선정하느라 시간이 조금이라도 걸린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김강민이 상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으러 직행했다.
그만큼 누구나 바로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2000년대생 20대 선수들이 활약하는 사이에서, 82년생 40대 선수가 노익장(?)을 과시했다.
최고령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 대단하다. 자신에게 정말 잊을 수 없는 날일 것 같다.
몇 회 동안 긴장하며 공을 몇십 개 죽어라 던지는 투수나, 타자 라인업에 들어가 계속 치고 수비하던 타자가 아니라, 대타로 한번 타석에 들어가 마무리 홈런을 때려낸 선수가 MVP가 될 수 있다.
훈련과 자기 관리를 꾸준히 하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래서 야구가 재미있고, 인생에 한방이 있다고들 얘기하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세를 예상했던, 정규리그 wire to wire 1위 팀 (시즌 내내 1위를 한 번도 내주지 않고 우승) SSG는 예상과 달리, 정규리그 3위 키움과 팽팽하게 한국 시리즈를 이어갔고, 이번 5차전에서 거의 질 뻔하다 이 끝내기 홈런으로 겨우 이겼다.
키움은 준 플레이오프에서 작년 우승 (디펜딩 챔피언, defending champion) KT와 5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치고,
20년 만에 가을 야구를 맛본다는 정규리그 2위 LG와는 4 게임의 혈투를 펼치고 한국 시리즈에 올라왔다.
투수진과 타자진이 좋다는 기본 외에도, 실수를 보듬어주고 서로 응원해주는, 친하고 서로 신뢰하는 것이 다른 구단들보다 더 많이 느껴질 정도로 팀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사실 이 경기의 주인공으로 예상되는 사람은, 김강민이 아니었다.
양 팀 한국인 토종 에이스 투수 맞대결로, 한때 류현진과 함께 한국 야구 2대 투수로 손꼽혔던, 메이저리그 경험까지 갖춘 김광현과 신예 안우진이었다.
두 명의 신구 에이스 투수 맞대결에서 누가 이기고 게임을 지배할지가 가장 큰 관전 포인트 중 하나였다. 긴 포스트 시즌으로 체력이 떨어지고 손가락 물집 부상이 있었던 안우진이 불리해 보였다. 충분히 쉬고 실력과 큰 경기 경험을 갖춘 김광현이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인생이 예상대로만 되면 재미가 있겠나. 야구도 마찬가지다. 김광현은 5회까지 지난 경기 승리로 사기가 오르고, 투수진의 피로로 조기에 시리즈를 끝내야 한다는 키움 타자들에게 5회까지 3점을 내줬다.
결과론적으로, 이때 이 정도로 잘 막아서 후에 역전 우승을 할 수 있었지만, 6회까지 무실점한 안우진이 판정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경기 막판으로 갈수록, 8회 초만 해도 김광현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안우진의 얼굴은 밝았다.
그리고 끝내기 홈런으로 승부가 결정되었을 때, 김광현은 큰 경기에서 에이스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마음의 짐을 덜어낸 듯 표정이 밝았고, 안우진은 그렇게 잘 던지고도 한국시리즈 승리 투수 1승 기록을 추가할 기대가 사라지면서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나도 대학교 때 친구들과 재미 삼아 농구 대회에 나갔다가 이길 땐 서로 좋다고 난리 치고, 운 좋게 4강까지 나갔다가 역전패하고 서로 말이 없던 경험이 있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
학교 일반인 농구 대회가 그럴진대, 냉정한 프로의 세계, 성적이 연봉으로 직결되는 상황에선 더 그럴 거다.
큰 경기에서는 경험이 중요하고, 실책이 승부를 가른다고 했다.
평생 야구만 한 야구 도사들 중 그해 가장 잘하는 두 팀이 붙었는데 당연히 실력은 두 팀 모두 출중할 것이고, 결국 누가 실수를 하지 않느냐가 승부를
가를 가능성이 높다.
이번 경기도 그랬다. 모든 스포츠가 기본 폼과 조직력 그리고 흐름이 중요한데, 결국 이 실책이 패배의 빌미를 제공해 버렸다.
8회 키움 유격수 김휘집이 실책을 범하며 출루를 허용했고, 포스트 시즌 키움의 특급 마무리 김재웅 투수가 최정에게 투런 홈런을 맞아버렸다. 4-2로 따라붙는 순간이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4-0이고 8회니까 거의 다 이겼네. 이런 방심이 들면 살얼음판 같은 승부에서 자칫 실수가 나오는 것을 종종 본다.
특히, 마지막 승리가 확정될 때까지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야구에서 배운다. 방심하고 마음만 앞서는 것은 반드시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스포츠가 실력도 실력이지만, 심리 즉, 마인드 컨트롤이 (mind control)이 중요한데, 출루시키지 않아도 될 타자를 출루시키면 투수는 실책을 이해하고 넘기고 내가 잘하자고 다짐하면서도 분명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남게 되어 있다.
그 어려운 것을 받아내거나 이겨내고 승부에 집중 결과를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이 돌부처다.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안 그래도 부담감으로 긴장되어 평소 실력이 나오기 쉽지 않은데 실투나 폭투 혹은 판단 미스가 거기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 점을 잘 알기에 타자로써도 꽤 잘하고 수비도 제법 안정적으로 했던 젊은 김휘집이 최정의 홈런을 맞았을 때, 그리고 김강민의 끝내기 홈런으로 경기가 종료되었을 때, 선발승이 날아간 안우진이나 홈런을 맞은 두 명의 구원투수보다 더 얼굴이 굳어져 있었던 것일 거다.
큰 무대에서 인생의 쓴 경험을 했고, 앞으로 잘하면 되니 훌훌 털고 잘해서 한국시리즈나 국제무대에서 환하게 웃는 선수로 성장해갔으면 좋겠다.
다행히 후속 타자를 잘 막아서 이닝을 종료했지만 리드하는 쪽은 심리적으로 쫓기게 마련이다.
그 정도면 잘했어라는 격려를 받으며 덕아웃으로 들어왔지만, 최원태에게 마무리를 넘긴 김재웅의 어딘지 찜찜하고 불안해 보이는 표정에서 그런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결국, 9회에서 그런 불안한 심리가 현실이 되었다.
그동안 잘해오던 키움의 마무리 듀오, 김재웅, 최원태. 포스트 시즌 계속되는 출전 피로로 구위가 떨어진 김재웅이 홈런을 맞자, 최원태도 다소 불안해 보였다.
선두타자 볼넷. 그리고 상대한 SSG 최주환.
폼이 불안정하고 저런 공에도 방망이가 나가는 걸 보니 마음만 앞서있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만일 헛스윙이 비디오 판독까지 가서 파울로 판명이 나지 않았다면 경기 결과는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배트를 바꾸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때 마음을 가라앉힌 것으로 보였다. 집중력이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고 폼이 좀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반면, 구위가 괜찮았던 최원태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팀이 이기고 있고 상대가 조급해 보이자 빨리 잡아내려고 공격적으로 피칭했다. 유인구는 유인한다고 보기엔 너무나도 무색하게 그냥 봐도 볼이었다.
집중력이 살아난 최주환은 마지막 회, 뒤가 없기 때문에 같은 최 씨라고 봐주지 않았다. 끈질기게 파울로 물고 늘어졌다. 회심의 공이 볼로 처리되자 너무나 안타까워하던 최원태의 표정이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발 아웃 좀 되어서 들어가 줘, 제발 빨리 좀 끝내자.
멀게는 오승환, 가깝게는 KT의 신예 박영현의 무표정과 마인드 컨트롤을 좀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결국 안타를 맞았고 주자 1, 3루 동점 주자 상태이자 홈런 한방이면 역전이 가능한 상태로 세팅했다.
그리고 위기관리에 실패, 김강민이 홈런을 치고 동료들과 환호하는 사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6차전은 전날 역전 승리로 기세를 올리고 1승만 남은 SSG가,
다 잡은 승리를 놓치고 기진맥진해 있는 키움을 누르고 2022 한국 시리즈 우승을 확정 짓고,
SK에서 SSG로 바뀌고 나서 첫 정규리그와 한국 시리즈 통합 우승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개인적인 바람은 절치부심하고 똘똘 뭉친 키움이 기적적으로 오늘 이기고, 내일 운명의 파이널 (final, 마지막) 경기에서 드라마를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생하는 선수들에게는 미안하긴 하지만.
그러려면 현재 한국 리그 최고 타자라는 이정후가,
이제는 옛날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해태 시절 한국 시리즈를 지배했던 때만큼의 활약을 해줘야 할 것 같다.
에이스는 위기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가을, 이런 빅 재미를 선사해줘서 너무 고맙다. 오늘 경기도 무척 기대가 된다. 한국 야구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