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o estas? 2-7. 이별

Chapter 2-7. 이별

by 이상

협상이 계속될수록 ㄱ 씨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


지난번 공문 회신 지연 건으로 실체가 드러난 후, 우호적인 관계는 유지하되, 잘못된 부분은 낱낱이 찾아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꼼꼼하게 서류들을 확인하고 공장에 계신 분들과 말씀을 나눠보니 허술한 부분이 참 많았다.


그런 부분들을 회의나 공문에 한 번씩 refer (참조) 해서 근거로 넣어주니 반응이 바로바로 왔다.


예전에 내가 공문 회신 지연 건으로 뛰어갔던 것처럼, 이제는 이 친구가 나에게 뛰어오고 연락 오는 일이 많았다.

역시 협상은 상대가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Sr. C,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 Amigo (친구)”


“근데, 넌 예전에 나한테 왜 그랬냐?

사실 엄청 많은데 너 입장 생각해서 지금 살살하고 있는 거다. 그나마“


하며 연두색 형광펜 친 서류들을 보여줬다. 그런 서류들이 바인더에 분류되어서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예전 서류들 뿐만 아니라 이전 내용들을 분석해서 계약서 내용과 함께 앞으로 이렇게 공문 보낼꺼예요하고 마지막으로 가다듬고 있는 공문 바인더들도 함께 보여줬다.


하얀 편인 얼굴이 더 창백해지며, 당장이라도 모든 바인더를 태워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식아, 내가 옛날에 깨알 같은 글씨로 된 두꺼운 책 10번을 반복해서 보고 시험 본 인간이다. 한국 사람을 물로 보긴. 매운맛 좀 보고. 우리 이상한 짓 말고 좋게 좋게 협상 끝내자.’


실제로 그랬다.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뿐만 아니라 회사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해외 사업 업무를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복사와 예전 서류들을 보는 일뿐이었다. 대학에서의 전공이 무색해졌다.


신입 사원 교육이 끝나고 본사 배치 후 한 달 정도는,


“C 사원, 퇴근시간 되었는데 뭐 하고 있어. 얼른 들어가.”


하시더니, 어느 순간 이 친구가 회사를 계속 다니겠다 싶었는지 두꺼운 영문 서적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제 좀 적응이 되지? 앞으로 업무 제대로 하려면 이런 책을 공부해야 해.“


하루 종일 이 책을 독파했다. 이해가 안 되면 일단 물어보기 전에 몇 번을 읽고 찾아보고 도저히 안되면 어디까지 찾아보고 생각했는지와 함께 어느 지점에서 막혔는지를 물어봤다.


특히, 점심시간 직후가 지옥이었다.


깨알 같은 영어를 읽고 있으면 너무나 졸렸다. 그래서 난 불면증이 없다. 잠이 안 올 때 그 두꺼운 책을 펼치면 바로 잠에 빠진다. 회사를 다니는 장점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렇게 10권이 넘는 책을 봤다. 거기가 매달 공부한 부분을 대상으로 구두로 시험을 봤다.


‘이러려면 차라리 고시 공부하는 게 낫지 않았나’


뒤늦은 후회.


“야, 회사에서 월급 주고 일 안 시키면서 공부까지 시켜준 걸 고맙다고 생각해야지”


학교 선배이자 회사 선배의 말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하드 트레이닝 (hard training)을 받은 나는, 2년 차 때부터 단독으로 출장을 다녔고,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일을 하며 실전에서 까이고 배우며 내공을 쌓아갔다.


캠브리지 졸업한 영국 변호사, 와튼 스쿨 졸업했다는 financing manager (재무 담당자)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도 보고 같이 일도 해본 나에게 남미의 작은 나라에서 현지 일만 해본 친구는 상대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현지에서 좋다는 대학 나와서 경험 쌓은 친구들이 있는 로펌과 accounting firm (회계법인)의 조력까지 받고 있어서 쉽지 않았을 거다.


벌써 몇 달 동안 여기 있으면서 현지 상황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다 파악이 되었다. 서류들도 정리가 상당히 된 상태라 회의에 들어가서 내가 답변을 하면 해당 논의가 정리되고 Mom (minute of meeting, 회의록)에 그 내용 그대로 내가 wording을 불러주고 사인하는 일이 많아졌다.


어느 날, ㄱ 씨가 찾아왔다.


“아미고, 나 이제 떠난다. 여기 일도 거의 끝났고 내 계약 기간도 거의 끝나가거든. 너하고 일하면서 재미있었다. 잘 지내.”


내심 미안했다. 아마도 내가 지적한 (point out) 부분 때문에 윗사람들에게 질책을 많이 받았을 거다. 신뢰를 많이 잃었으니 계약 연장도 힘들었겠지.


그러길래 서로 신뢰를 쌓고 도와가며 해야지 상대방 죽이겠다고 그러면 누가 그래 나 죽여라 하겠냐,

반발해서 공격하지. 너도 애도 많고 앞으로도 일 많이 해야 할 거니 이 참에 좋은 공부 했다고 생각해라.


라고 말은 하진 않았다.


그냥 그동안 수고했다. 잘 지내라고만 했다.


“그래, 너나 나나 우린 어차피 여기 돈 벌려고 온 빰삐노 아니냐.”라고 한다.


그땐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남미에서 못 사는 나라에서, 자원이나 일이 있는 나라에 일자리를 찾아서 오는 친구들을 빰삐노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 너도 가고 나도 언젠가는 가고 여긴 운영에 필요한 사람들만 남고. 그게 사업이고 인생 아니겠냐. 한 시절 같이 잘 지냈고 나도 많이 배웠다.


살다가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Hasta luego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협상 진행 상황을 본사에 보고하고, 지침을 받았다.


잘 되고 있는 것 같으니 조금만 더 힘내라고.


‘두 달은 무슨. 이러다 1년 되게 생겼는데 복귀 얘기는 한마디도 없네.’


말은 못 하고 열심히 해서 조속히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한 후배와 보이스톡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추가로 조금 더 하던 중,


갑자기 올해 초 임원 승진한 초임 임원 분 소식이 궁금해서 물었다. 직원 연락처 홈페이지에서 검색이 안되어서 계열사 파견을 가셨나 하고만 생각했다.


“그분 그만두셨어요.”


앙? 그렇게 열심히 하다 이제 임원 되었는데 왜 그만둬?


“모르셨어요? 뇌출혈 오셔서 병가로 몇 달 쉬셨는데, 복귀했을 때 다른 분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셔서 애매하게 있다가 그만두셨어요. “



그분은 내가 입사 때부터 보았던 정말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다. 항상 바쁘고 집에도 정말 늦게 들어가시고. 새벽까지 일하다 회사 근처 찜질방에서 자고 샤워하고 바로 일하는 것도 자주 보았다.


저러다 쓰러지시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진짜 쓰러지셨나 보다.


”부장님은 정말 일을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요. 일하고 결혼했다는 말이 실감이 나요. “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모르지?”


“성과를 내고 인정받아서 승진도 하고 임원도 되고 월급 많이 받고 그런 거 아닌가요?”


“지방대 나와서야.


SKY에, 외국 유학 다녀온 애들 즐비한데 지잡대 나온 내가 성공은 고사하고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 하다 보니 계속 이렇게 해온거야.“


안타까웠다.


지방대를 나오건 서울대를 나오건 열심히 해서 결과를 만들고 인정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몸은 거짓말 안 한다고 젊었을 땐 그래도 버티는데 나이 드니까 몸이 못 버티셨나 보구나.


그래도 그동안 20년을 저렇게 해오셨다는데 몇 달 자리를 비웠다고 저렇게 내쳐지나. 냉혹하다.


회사를 오래 다니다 보니, 안타까운 사고를 당하신 분들도 있는데 자기 딴엔 열심히 하다 보니 고혈압, 당뇨, 공황 장애에 걸린 분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스트레스받다가 공황 장애 걸려서 약 먹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퇴사를 결심한 사람들을 뉴스로만 접하다가 이젠 주위에서도 제법 보게 된다.


나중에 회사 근처에서 우연히 뵈면 갈비탕이라도 한 그릇 사드려야겠다.


이 참에 푹 좀 쉬시고, 건강 잘 챙기고 회복해서 인생 2막을 잘 열어가셨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