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 남미 축구는 전쟁
지진의 여파로 뒤숭숭한 상태로도 일은 계속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TV에선 사상자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지진의 피해를 보여주는 무너진 집들이 계속 나왔다.
다행히 직접 관련된 사람이 다치거나 죽지 않고, 바로 옆 동네가 아니라 충격이 조금 덜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지사에 출근을 했는데 현채 친구들이 절반 이상 안 나왔다.
지친처럼 또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었다.
‘월급날도 아닌데 왜들 이렇게 안 나왔지.’
월급 받으면 시원하게 밤새 놀기 때문에 다음 날 안 나오는 친구가 많다.
한국 같으면 뭐라고 한마디 하겠지만, 마치 금요일, 토요일 아파트에서 시끄럽게 밤새 파티를 해도 어느 정도 용인되듯이, 이곳에선 한 달 동안 고생했으니 하루 정도 안 나올 수 있지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알고 보니 전날 남미 축구 클럽 대항전이 있었던 날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정도로 보면 되는데, 각 국가의 대표 클럽 간 대항전을 하는 거였다.
아, 어쩌면 유럽 챔피언스 리그로 이해하는 것이 더 맞을 것도 같다. 자기 나라, 더군다나 자기 지역 축구팀이 남미 전 대륙 프로 축구팀 중 손꼽히는 팀끼리 경쟁하는 대회에서 상위리그로 올라가니 무척 좋아했었다.
남미 프로축구는 사실 말이 축구지, 전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런던 출장 당시 운 좋게 이탈리아 유벤투스와 영국 첼시 간 챔피언스리그 8강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경기보다 응원하는 것이 더 신기했다.
첼시 홈구장은 싸울까 봐 홈팀 응원 관중과 어웨이팀 응원 관중의 출입구가 달랐다. 말 탄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난 하필 어웨이 쪽 표를 구해서 이태리 친구들 쪽 자리에서 경기를 보았는데 어찌나 격렬하게 응원하는지 신나면서도 시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남미 축구는 그보다 더 하다고 보면 된다. 국내 리그 내 약팀 간 경기는 그래도 조금 조용한데, 이렇게 international 국가 간 프로 팀 경기이면서 타이틀이 걸리고 상위 리그라면 난리가 난다. 폭죽 터뜨리고 고함지르고 웃통 벗고. 월드컵에서 부진하고 실수했던 국가 대표 선수가 살해된 사건까지 발생하기도 하고 말이다.
정말 축구 경기 하나 가지고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
어찌 보면 역사적인 요인도 있는 것 같다. 세계 대전 당시 영국과 이탈리아의 전쟁. 우리로 보면 한일전처럼 역사적인 감정이 개입된다. 에콰도르와 페루도 국경을 인접해 있어서 영토 분쟁이 있어서 그랬는지 국가 대표 가 A 매치가 있거나 상위 프로 팀 간 경기가 있으면 난리가 난다.
그러니 월드컵에 자국이 진출하면 어떻겠나.
우리 붉은 악마 거리 응원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남미 대륙에서 월드컵이 치러지다 보니 주요 경기가 있으면 현지 친구들은 전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보였다.
그래서 지사장님이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90분간 경기 보고 일하자고 하면,
‘이제야 제대로 좀 하네.
한국 사람들 여기 문화 모르고 자기들처럼 주구장창 일만 시키려고 하는데 이제 여기 좀 아네.‘
하는 표정으로 반긴다.
어차피 일은 제대로 안되고 컴퓨터 화면 아래쪽에 방송 화면을 조그맣게 숨겨 놓고 보거나, 휴대폰을 몰래몰래 보거나 그것도 안되면 라디오 비슷한 걸로 듣기라도 하려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으니 차라리 경기 보고 일하는 게 낫다.
자기들끼리 이 얘기, 저 얘기하면서 어찌나 재밌게 보던지, 환호하고 실망하고 정말 축구에 인생이 있는 것처럼 축구 보는 현지 친구들을 보면 희로애락이 보일 정도다.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경기가 월드컵 때 브라질과 독일이 준결승전에서 붙었을 때였다.
자국 팀이 이미 떨어졌는데도 관심이 매우 높았다.
결과는 예상외로 브라질이 개최국이었는데도 7-1로 깨졌다.
우리도 우리 대표팀이 5-0으로 처참하게 깨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남일 같지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독일이 한참 이기면서도 전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그야말로 냉정한 전차 부대처럼 무자비하게 계속 골을 넣는 모습을,
자기 나라 대표팀도 아닌데 정말 슬픈 얼굴로 말없이 쳐다보던 현지 친구들이 기억난다.
그런 독일을 우리는 어떻게 이겼을까. 손흥민을 비롯 우리 국가 대표 대단하다. 막간을 이용 이번 월드컵에서도 우리 축구 대표팅 파이팅!
결승전은 더 인상 깊었다.
독일이 아르헨티나마저 꺾고 우승했는데, 대회 MVP는 아르헨티나 메시였다. MVP가 되면 좋을 만도 한데, 꼭 그렇지 않았다.
우리나라 이강인이 U 대회 준우승이라는 대단한 성적을 내고 대회 MVP를 한 멋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좋아하면서도 뭔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운동선수에게 패배, 승부욕이라는 것은 그런 것인가 보다 했다.
메시도 표정이 좋지 못했는데, 현지 친구들이 꼭 그랬다.
사실 남미 여러 나라 친구들은 아르헨티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엄청난 농수산 축산 등으로 세계 4위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던 이 친구들은 자기는 남미 구성원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기를 서슴지 않을 때도 있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아서 백인들이 많은 나라인 데다 콧대 높게 그렇게 말하니 친근감이 들 리 없다.
잘 나갈 때는 이태리마저 잘 모르겠고 우리가 최고야 이런 마인드도 있었던 것 같다.
재수 없어라는 남미 친구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지금은 경제도 안 좋고 전성기 때의 모습도 많이 잃어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왠지 먼지 덮인 왕국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자부심만은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렇게 싫어하는 아르헨티나인데도 그래도 같은 남미 대륙 식구라고, 자기 대륙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다른 대륙 유럽 친구들이 우승하는 것보단 싫어도 자기 식구가 우승했으면 하고 바랬나 보다.
어렸을 적 세계를 주유하며 연구하는 고고학자, 역사학자가 꿈이었는데,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면서 회사 일하고 살다 보니 지금은 거의 반 인류학자가 되어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래서 내가 아직도 회사를 다니나 보다.